본문 바로가기
  • 읽고보고쓰고
READING/역사·문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 - 이덕일

by 체리그루브 2010. 6. 25.
728x90


1800년 예기치 못하게 정조가 죽었다. 당연히 그의 정적이던 정순왕후가 순조를 앞세워 수령첨정을 시작한다. 조정은 노론의 판이 되었고, 남인은 천주교로 인해 박해받는다. 대대적인 공세와 탄압으로 많은 남인들이 죽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신유사화(1801년)라 부른다.

정약용이 죽지 않고 살아 유배지에 보내진 것은 천운이었다. 이제 그의 뒤엔 정조도 없다. 의지할 이 없는 곳에서 그는 살아내야했다. 대부분 유배지에서 낙심하여 죽게 되지만, 정약용은 스스로를 추스려 일어선다. 그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주교사전」 등의 역작을 내 놓는데, 그 외에도 400 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저자 이덕일은 정약용의 저술의도와 업적을 보며 그가 후대에 받게 될 평가에 대해 더도말고 덜도말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지기를 바랬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산은 자신을 수세에 몰아넣었던 천주교 신자라는 오해를 떨쳐버리기 위해 변호해야했다. 살아남아 신유사화 때 죽어간 억울한 이가환, 권철신 등도 변호해야했다. 실제로 정약용은 천주교를 버렸었다. 역사는 그를 실학의 집대성으로 보지만, 실은 유교에도 당대 누구보다 정통한 이였다. 그의 주역 비판은 그간 중국과 조선의 많은 선비들이 놓친 맥락을 잘 짚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에 두었지 단순한 이론에 치부하지 않았다.

그가 말년에 왕에 인정받아 조정의 관료로 높게 쓰였다는 해피엔딩 결말은 없었다. 다만, 끝까지 죽음의 위협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담담했다. 자신의 일에 끝까지 충실하게 살다간 그는 75세의 일기로 뒷산에 조용히 묻혔다.

우리 조상 중에 이토록 존경할만한 이가 있다는 것에 내심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인의가 있어 사람을 따뜻하게 사랑할 줄 아는 이였고, 정직하여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죽음이 드리워진 환경에서도 침착하게 바르게 살기를 갈망했다. 어디서 그에게 그런 자신감이 있었던 것인지. 실로 하늘의 도움이 없이 가능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그가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할 뿐이다. 휘황찬란한 결말이 아니어도 감사하다. 이처럼 그의 절치부심을 긴 후대에도 알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을 닮고 싶고 알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의 삶을 추스려 그와 같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가 성호를 마음의 스승으로 두었던 것 처럼 나또한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두고 싶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