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저자 브루스 커밍스 저, 조행복 역
현실문학, 2017
브루스 커밍스는 시카고 석좌교수이며,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학자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은 그의 신간이다. 19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이 발간된 이후 많은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호응얻었고,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간이 흔드는 반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반대의 정치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좌파'라는 낙인을 받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미국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많은 문헌과 고증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라는 것이고, 후에 소련의 비밀문서 해제로 일부 그의 주장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이 책에서는 여전히 한국전쟁의 기원을 종전의 주장인 1945년보다 더 들어간 1930년대의 만주국에서의 유격대와 일본군의 전쟁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이는 1995년 연세대 박명림 교수에 의해 "한국전은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자 합의에 의한 명백하고 계획적인 남침"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존 커밍스의 수정주의 사조를 무너트렸지만, 이 책 또한 이를 인식한듯 더 들어가서 1930년부터의 기원을 갖고 접근하고 있다.
아베는 1급 전범이자 전후에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0년대 만주국 총무청 차장을 지냈다. ... 아베 신조는 물론 황실과도 인척이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습 공산주의의 면모를 지녔다면, 전후 일본은 세습 민주주의다. 의원들은 70~80%가 아버지로부터 의석을 물려받았거나 유명한 정치 가문 출신이었다. 일본에서 아베나 아소 같은 사람이 권좌에 오르면, 북한 지도부는 다른 이들은 모르거나 잊어버린 그들의 가계를 기억한다. (75-76)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발발이 한가롭고 평화롭기만 한 이땅에, 무력 통일의 야욕을 품은 공산세력에 의해 빚어진 민족적 비극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당시는 정국 자체가 혼란스러웠고, 전국이 산발적 내전에 가까운 소요와 정적살해가 이미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농민이 지주를, 노동자는 자본가를, 소련과 미국의 대치상황, 그리고 좌익과 우익이 대결이 그랬다. 특별히 자신의 정적을 모함하여 해치는 것이 가능한 사회였다. 도처에서 테러와 국가 폭력이 자행되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38선 지점에서는 크고작은 국지전이 있었다는 것은 팩트다. 이것은 소련의 기밀문서 해제를 통해 공산3국이 계획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감안 하더라도, 당시의 상황 자체는 이미 매우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수정주의는 무너졌다느니, 터무니 없는 주장이었다느니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 전에 죽은 아니, 학살당한 인구만 10만 명이 넘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미국인이 가장 모르는 것은 그 전쟁이 섬뜩하리만큼 지저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간인 학살의 더러운 역사가 끼어 있는데, 북한을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보는 미국의 생각과 달리, 그 최악의 범죄자는 겉보기에 명백히 민주주의 체제였던 동맹국 남한이었다. (22)
다른 기자의 눈에 비친 최악의 존재는 남한 경찰이었다. 이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고, 가난한 소녀들을 유곽에 넘겼으며,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겠다며 사람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갈취했고, 수많은 정치범을 처형했다. (134)
한편 하우스먼은 비공개를 전제로 한국인들은 "잔인한 개자식"이고 "일본인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했으며, 한국인들에게 이를테면 처형한 시신을 가솔린으로 제거하여 처형 방법을 숨기고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돌리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잔인성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196)
북한은 최소한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들을 숙청하는 작업을 통해 역사를 과격하게 청산해 갔지만, 그 덕분에 남한은 북으로부터 도망친 지주의 자녀들이나 피난민들로 들끓었고,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갈망하나 제대로된 청산이 되지 않은 남한 정부는 거의 일제의 통치를 계승한 것에 가깝도록 청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선량한 민간인을 공산당으로 몰아, 붙이는 공포 사회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상황이 전개된 데에는 그저 원만히 해결하고자 하는 미국의 방만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여 놀랍도록 너그러운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그 이웃 나라들에 전쟁 피해를 배상하지 않도록 했으며, 기시 노부스케 같은 자들을 권좌에 복귀시켰다. 미국인들은 또한 한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일본과의 관계에 늘 따라다니는일제 지배의 상처, 지금도 여전히 쓰라린 그 상처를 자주 잊는 것 같다. (81)
남한에서는 이러한 협력에 대해 충분하고 솔직하게 논의되거나 처벌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곪아터졌다 2004년에 가서야 마침내 정부는 친일 협력에 관한 공식적 조사에 착수했다. 1990년 이전 남한 엘리트 가운데 어림잡아 90% 이상이 친일 협력자나 그 가문과 연고가 있었다. (91)
처음 한국전쟁 발발이후 미국은 후퇴를 거듭했으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상황을 역전하였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맥아더의 전술은 무모했다. 북진 명령으로 그해 겨울 참혹한 1.4후퇴를 감행해야했고, 결국 1,2차세계 대전을 통해 난다 긴다하는 미국의 내노라 하는 장성들이 거쳐갔지만, 현재와 같이 휴전을 만드는 상황에서 마무리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알려지지않은 전쟁'으로 묘사한다. 아마존 서점가에서도 몇권 없을 뿐만 아닐, 누군가 만든 한국전쟁 관련 추천 10권 조차도 대부분은 참전용사의 경험담이나 기자가 쓴 것으로 미국 관점의 왜곡된 서적이 많단다. 저자는 특별히 잘 알려진 <콜디스트 윈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이름은 정확히 둘이다. 대통령 이승만과 그의 종전 이후 저명한 기자들이 방문할 때마다 항상 동행시켰던 쓸모가 많은 전직 장군 백선엽이다. 백선엽은 일본제국 편에 서서 싸웠고, 수십 년간 사사카와 료이치 같은 일본 전범들이나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여러 나치들과 가가운 친구였다. (117-118)
이는 1950년대에는 진실이었겠지만, 미국과 세계 도처의 역사가들이 채운 서가의 책들이 몇 십년 전에 이를 교정했다. 그러한 연구를 진지하게 읽었다면,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121)
남한은 서울 수복 후에도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피난가지 못한 시민들이 북한을 부역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곳곳에서 살인이 저질러 졌고, 미국은 방관했으며, 철저히 언론을 통제했다.
남한이 영토를 회복하고 북진하면서 유사한 잔학 행위들이 한국 전역에서 발생했지만, 이때 용감하고 정직한 저널리즘도 갑자기 사라졌다. 세계가 남한의 잔학 행위에 격분했으나, 미국의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1951년 1월 "종군기자들은 완전히 군대의 사법권 아래 들어갔다." 동맹국과 동맹국 군대를 겨냥한 비판은 금지되었다. "평판을 떨어뜨리는 논평은 무엇이든" 검열관의 검은 붓질에 지워졌다. ...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기자와 편집자들은 거짓 기사를 날조하기도 했다.(135-136)
당시의 미국 본토의 정세는 불행히도 매카시즘의 열풍이 뜨거웠다. 따라서 시민 불복종과 공개적인 조사는 불가능했다. 동맹국의 잔인함을 묵인함으로써 자신들이 참여하는 전쟁의 정당성을 지지받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각종 검열을 통해 또는 비밀문서로 봉인함으로써 오늘날에까지 이른 지도 모른다. 미국은 한국전쟁이후로 상비군을 줄여오던 것을 중지하고, 군산복합체를 구성함으로써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서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했을 당시 몇 년 동안은 상비 전력이 크게 축소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불량 국가들" 때문에 계속 유지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이 역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또 다른 무정형의 전 세계적 봉쇄를 제공했다. (297)
이 지점에서 좀 오래되었지만, 이 블로그에 게재했던 옛글을 소개한다.
http://blog.daum.net/nextkey/8
어쨌든 한국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정권에 들어서서 이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행한다. 참으로 오랜 기간의 침묵을 깨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던 작업으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들은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두려워 하는가? 자기들 가문의 일제 부역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감추기 위함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대목에서 나는 가슴 속 밑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한국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는 2000년 9월 조직되었다. 그 임무는 한국전쟁 이전과 전쟁 중에 남북 양측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2005년 12월 1일 학살 조사를 지속하고, 좌익으로 몰려 국립묘지에서 배제된 항일독립투사들을 조사하며, 인권 침해와 테러 행위, 정치적으로 날조된 재판과 처형을 조사하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거의 1만10000건에 달하는 잘못된 죽음이나 학살이 위원회에 신고되었는데, 이 중 9461건이 민간인 학살이었다. 2008년 말까지 3269건이조사되었다. 154곳의 매장지가 발굴되어 수백 구의시신을 찾아냈다. 대부분 열 살 미만이었던 어린이의 시신도 수십 수 발견되었다. 추측컨대 일가족 몰살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결국6월에 전쟁이 시작된 후 남한 당국과 이를 보조했던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략 10만 명을 처형하여 참호와 광산에 내버리거나 바다에 수장했던 것으로 보인다.(276)
우리는 역사에 맞닿아 살아간다. 오늘날 우리와 분리될 수 없는 한국전쟁은 잊혀진 기억이지만, 그날 가족을 잃었던 사람들에게는 거기에 멈춰선 기억 자체다. 차마 지속해서 읽기 힘든 부분도 더러 있었다. 만일 내 가족에게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전쟁 자체보다 사회적 불신과 만행, 갖은 폭력들로 얼버무러진 사회는 지옥 자체였을 터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할까? 다양한 질문과 상념 속에서 사로잡힌다.
우리는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세대는 이미 아니지만, 성찰함으로써 인간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소양으로 격량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을 다짐해야한다. 우리는 진실과화해위원회를 통해 가해자의 진술과 피해자의 눈물을 보았다. 이 기록을 후대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끼리 그처럼 잔혹해지지 말자고 약속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교과서는 옳지 못했다. 박정희를 미화하고, 북한의 남침설을 공고히하는 따위의 역사는 우리에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뿐이니 말이다. 수정주의가 퇴조했다느니 하는 말도 옳지 못하다. 당시 있던 사실들을 부인하려거든 그리 하라 하자. 우리는 당당히 기억하고, 생각하고, 생각한대로 다짐한대로 행동하기로 할 것이니.
다음은 이 책을 읽으며 밑줄 쳤던 나머지 문장들이다. 종종 잊혀질 때마다 둘러보며, 기억하고 싶다.
한국은 오래된 나라이다. 지구상에서 영토 경계, 민족, 언어가 1000년 넘게 변하지 않은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한국은 중국 옆에 있으며 그 나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늘 독자적인 문명을 유지했다. 이 점을 아는 사람은 거의없지만, 가장 예리한 관찰력을 지녔던 기자 레지널드 톰프슨은 정확하게 지적했다. "중국의 사상과 법은 한국이라는 직물을 엮어낸 실이다. (...) 로마의 법이 영국을 만든 것과 같다." (32)
남한을 차지하기 위한 이 전쟁에서 남한은 사망 11만 1000명, 부상 10만 6000명, 행방불명 5만 7000명, 주택 완판 31만 4000채, 부분 파손 24만 4000채의 손실을 입었다. 미군은 사망 6954명, 부상 1만 3659명, 교전 중 행방불명 3877명의 손실을 입었다.. 북한군 사상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5만 명에 달 할 것이다. (54)
그 결정은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제81호NSC-81에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 딘 러스크가 작성한 이 문서는 소련이나 중국이 개입할 위험이 없다는 가정하에 맥아더에게 북진을 허가했다. (55-56)
기억해야 할 점은 한국전쟁이 내전이며, 영국의 어느 외교관이 말했듯이, "모든 나라는 자신만의 장미전쟁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순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와 민족 분단, 외세 개입으로 초래된 엄청난 긴장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며, 그저 휴전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72)
최근에 총리를 역임했던 다른 인물인 아소 다로도 일본제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는 탄광을 소유한 부자의 상속자인데, 그의 가족회사는 전쟁중에 수많은 한국인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잔인함과 끔찍한 노동조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연합군 전쟁포로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영국군의 포로가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아소 다로는 총리를 지낸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이므로, 그의 가계는 메이지유신의 지도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76)
소정희 교수의 책은 또한 일본군 위안소에 들어갈 이들을 데려온 조달자들 중 다수(절반 이상)가 한국인이었다고 상세히 설명한다. (79)
수십 년 동안 남한 정보기관은 김일성이 남의 이름을 사칭했다는 한국의 유명한 애국자의 이름을 빼앗은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정보를 퍼트렸다. 이렇게 연막작전을 펼친 진짜 이유는 너무나 많은 자국 지도자들이 일본을 섬겼다는 슬픈 진실에 있었다. 이런 거짓 정보는 곧 진실 앞에 무너졌다. 1989년 서울에서 한국 공산주의연구의 선도자인 서대순이 젊은 청중에게 마침내 진실을 이야기할 수있었을 때, 김일성이 실제로 항일 투사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청중은 모두 박수를 터뜨렸다. 한 편 북한은 열 살짜리 아이가 들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김일성의 업적을 심하게 부풀리 고신화로 만들었다. 진실은 과거 남한 정부의 필사적인 거짓말과 북한의 끝없는 과장의 드넓은 간극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85)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몇 년 전에 끝났지만, 그 두 전쟁 사이에는 마치 한 세대가 끼어 있는 것 같다. 아마존 웹사이트에 "한국전쟁"이라고 치면, 아직까 지살 수 있는 책이 몇 권 나온다. 대개는 참전 군인이나 군사사가가 쓴 책이다. 아마존닷컴에 에드먼드 버크라는 사사람이 "한국전쟁에 관한 최고의 책 열 권"을 올려놓았다. 한 권을 제외하면 전부 미국인이나 서방측 사람이 쓴 것인데, 그 한 권은 하진이 쓴 소설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 나온 지 수십 년이 되었고, 학자들의 책은 없다. 도서관에 가면 베트남전쟁에 관한 서가는많이 찾을수 있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서가는고작 한두 개에 지나지 않는다. (116)
애치슨의 연설을 낳은여러 초안에서 남한은 일본과 더불어언제나 미국의 직접적인 책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애치슨은 이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이승만이 겁 없이전쟁을 시작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애치슨이 남한의 전차와 공군력의 보유를 막은 이유도 바 로여기에 있었다. (119)
'교활한'과 '빈틈없는'은 아시아인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라붙는 기본적인 형요사이다. 특히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고 백인 전용 주택 규정으로써 그들을 차이나타운에가두어놓았던 시기에 이러한 표현을 썼다.(151)
마르크스도 "아시아적 형태"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언제나 진정으로 한 가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였다. (153)
하우스먼은 어느 인터뷰에서 한국군의 아버지를 자처했는데, 이는 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하우스먼은 한국인 장교들을 포함하여 누구나 이사실을 알고 있지만 공개적으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6)
그러나 설리번은 나아가 이 나라에는 "빈부격차가 매우 크며", 중간층 농민과 빈농은 "근근이 살아간다"고 주장했다. 설리번은열 곳의농가와 인터뷰를 했는데, 경직지가 전부 자기 소유인 사람은 없었고 대다수가 소작농이었다. 지주는 생산물의 30%를 가져갔지만, 추가로 빼앗기는 것(정부의 세금과 다양한 "기부금") 한 해 수확분의 48%에서 최대 70%에 이르렀다. 남한 반란의 주된 원인은 보통 한국인의오래된 불행, 즉 토지 관계의 사회적 불평등 및 극소수 부자와 대다수 빈민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었다.(200-201)
결국 남한에서 최대 10만 명의 한국인이 한국전쟁 이전에 정치적 폭력으로 살해되었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최소한 10만 명이 더 살해당한다. 알다시피 동족상잔의 잔인한 싸움이었던 스페인내전은 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반목을 초래했다. 그 내전 도중에 그 후에 프랑코의 테러가 초래한 정치적 살인에 관한 최근 연구는 약 10만 1000명이 살해되었다고 제시한다. 다른 13개 주를 계산에 넣으면 전체 숫자는 13~20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 스페인은 1950년 6월보다 한참 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한국내전의 비교 대상으로 가장 적합할 것이다.(201)
대한민국은 내부의 반란과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여 신속히 군대를 확충했다. 1949년 늦여름 남한군 병력은 10만 명을 넘었는데, 북한군은 1950년 봄이 되어야 이 수치에 도달한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서 적과 동맹국 둘 다 제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내전 억제를 추구했다. 따라서 미국은 남한군에 북한 침공에 쓰일 수 있는전차와항공기 등의 대형 무기를 공급하 지않았고, 성미 급한 남한군 지휘관들이 38도선을 따라 충돌을 유발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미국은 후자의 경우 성공하지 못했다. 1949년 5~12월에 경계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지속된 전투는 미국 내부 자료에 의하면 대체로 남한군이 시작한 것이었고, 1950년 한국에 국제 연합 군사감시관을 파견한 주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북한과 남한 둘 다 감시해야 했던 것이다. (202)
종전 후 미국 공군은 집중 폭격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설득했다. 공군 장군 오토 웨일랜드는 24시간 연속 폭격으로 북한에 조성된 "공포와 사회 혼란"은 휴전을 강제한 "가장 강력한 요인"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틀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틀렸다. 그렇지만 공군은 똑같이어리석고 무의미한 파괴 행위를 베트남에서 되풀이했다 집중 폭격은 어떤 전쟁에서도 결정적인효과를 내지 못ㅎ해ㅆ다. 그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었을 뿐이다.(228)
가장 고통스런 기억은 유교의 세계관에서는 결코 부모에 앞서서는 안되는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죽은 자에게나 살아남은 자에게나 삶의 의ㅣ 자체가 우롱을 당하며, 사회적 기억은 파국의 후유증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한국에는 마을 전체가 전부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다. 바로 그날 학살이 일어났거나 마을이 전멸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양분된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진실 앞에무너진다. 북한과 남한의 긴 화해의 시기에 이산가족의 애절한 재회가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275)
미주.
여러 참전 군인들이 베트남보다 한국에서 고의적인 상관 살해가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고 내게 말했다. 내게는 이 문제에 관해 판단을 내릴 방법이 없다. (330)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된 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홍구의 뛰어난 역사적 해석은 북한 지도부의 기원에 관해 영어로 읽을 수 있는 최고의 자료이다.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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