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책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동기가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겠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 내지는 교양 있게 보이기 위한 신변잡기 지식을 소유하여 만인 앞에서 '구별짓기'로 나의 나됨을 돋보이게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솔직히 왜 그런 욕구가 없었겠는가마는 이런 '교양'을 습득한다는 것이 어디 '단순 읽기'로 되는 것이겠는가?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 읽기 이상의 노력을 요하는 데, 그만한 노력을 하느냐 하는 면에서 나는 낙제생이다. 그저 내가 사회학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기에 강준만 교수의 쉬운 글로 접하려 하는 것. 누군가 이 사회의 어떤 구석이 본래적으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에 단순 희열을 느끼며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음모로 일구어진 검은 세력의 의도였다는 것에 있어서는 두 주먹 불끈 쥐며 불의한 집단에 대해 흥분하는 것. 그러면서 나를 조금 반성해 보는 것. 그것이 현재 나의 글 읽기의 전부인 것이다.
이 책은 97개에 이르는 사회적 이슈를 사회학적 이론과 언론의 기사 등을 발췌하여 그 의미의 다양성을 부각시키고 문제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지식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공론화 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용어들을 모두 하나같이 내 글쓰기로 요약하며 기억해 두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그것은 내 감상을 기록한다기 보다는 나를 또 다른 교양주의로 몰아넣는 방식이라 생각이 들어, 그의 글에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을 3개의 범주로 묶어 글로 남기며, 내 사색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자 한다.
그의 글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3가지를 느낌대로 기술하자면, 첫째로 미디어와 ‘시장논리’에서 빚어지는 사회 문제를 들 수 있겠다. 촘스키는 미디어가 이미 사기업과 같은 존재라고 평가했다. 여론조작이 대표적인 형태인데, 1960년대 프랑스 정치에 여론조사 방법이 도입될 시절, 부르디외는 강력히 항의했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여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하였다. 아마도 질문의 각도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는 여론조작으로 인해 지배세력의 입맛대로 시민이 우롱당하는 비이성적 사회가 가능하리라는 것을 내다 봤던 것이 아닐까 싶다.
미디어의 ‘시장논리’는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시장구매력이 있는 세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구세대를 외면하고 신세대에게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차별받는 구세대는 신세대의 구색을 곱게 볼 리 없어 결국 세대 간의 갈등 심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의 ‘시장논리’는 ‘디마케팅’과 같은 형태로도 나타난다고 한다. 즉, 시청률 Top 10에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주로 노인층과 저소득층 시청자들에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면, 도중하차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광고주들이 환영하지 않기 때문에 미디어의 자본의 논리에 공평성은 훼손되고 만다. 이처럼 수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비자들을 의도적으로 밀어내는 방법을 디마케팅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시대 미디어에 대한 불행한 자화상이 아닐 수 없으며, 결국 미디어조차 자본논리에 좌우되는 형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주제인 것 같다. 저자는 여론조사가 민주주의에 있어 딜레마라고 설명하며, “여론과 여론조사의 한계를 널리 알림으로써 정부와 국민 모두 여론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끔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148)라고 말한다. 타당한 의견이다. 확대하여 부연하자면, 미디어로 인해 빚어지는 세대 갈등과 빈자를 밀어내는 현상들도 미디어의 자본 속성이라는 것을 늘 꿰뚫어 보는 똑똑한 시청자들이 됨으로써 훼손된 공공, 공익성에 대한 시청자의 견제가 미디어에게 늘 필요하다 할 것이다.
비중 있게 다루어진 주제 중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사회 시스템에 녹아있는 지배계급의 숨은 의도들에 관한 것이었다. 부르디외는 고등교육의 ‘실력주의’ 시스템을 일종의 공평한 선의의 경쟁구도라기 보다는 지배 계급이 합법적으로 사회를 통제하고 지위를 상속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라고 이야기 한다. 부자가 빈자보다 더 나은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부는 그로인해 되물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과연 투입된 자본의 량에 의해 교육이 갈리는 현상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 차원까지 끌어올리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진다. 그 비판이라는 것도 실력주의가 일종의 속임수”(120)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그치자고 말한다. 논지가 거대담론으로 번질까봐 중단한 것은 이해 된다. 적어도 사회가 매겨준 성적에 너무 한탄하거나 자조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니, 마음의 부담은 덜자고 했으면 어땠을까?
어쨌든 이러한 실력주의는 ‘패거리주의’를 낳게 되는데, ‘패거리주의’가 갖는 합리적인 이유나 순기능도 있겠지만, 이로 인해 더 큰 죄악들이 은폐되는 것에 대한 문제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이것은 비판적 지식인의 대상으로 한정짓기 보다는, 성숙한 시민의 의식가운데 있어야 할 사회비판으로 자리 잡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배계급의 안전한 보금자리를 위해 고안된 ‘벙커도시’라는 개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보안유지를 철저히 하기 위해 외부인 출입의금지나 가난한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 구조의 도시를 일컫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시의 개념으로 존재하진 않지만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이와 같은 주거형태를 띄고 있다. 택배가 와도 타워팰리스의 내부직원에 의해 각 가정에 배달이 이루어지고, 피트니스나 독서실, 제과점, 노래방 등 공공시설을 자기들끼리만 이용하는 것이다. 독특한 구별짓기와 인맥형성의 독과점이 일어나는 인간 종을 볼 수 있는 희귀한 표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배계급의 확실한 계층 굳히기로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강남신드롬’이 될 것이다. ‘강남신드롬’의 목적은 중후한 인맥 형성이다. 이 사회가 그만큼 인맥 자체가 능력으로 통용되는 사회라는 의미에서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다. 저자는 “인맥의 중요성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건 아니므로 우리 자신을 너무 폄하할 필요는 없다.”(337)고 말하지만, 결국 “한국의 경우에 특별히 문제가 되는 건 인맥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으며 ‘인맥의 중앙집권주의’ 또는 ‘인맥의 독과점 체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338)이라고 지적한다. 인맥에 대한 비판에 있어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이 인맥이 보수와 진보의 구분마저 뛰어 넘어 작동하는 것이다. 열띤 TV 토론으로 양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다가도, 자리를 털고 나오면서 “우리가 남이가?” 하는 그 학연 인맥의 위력을, 우리 비판하는 시민은 분명히 갖고 있어야 하겠다.
지배계급만의 독특한 보호 법률로서 ‘국가보안법’도 제기하지 않으면 섭섭할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론자의 주장 중에 다음의 내용이 있으니 말이다. “지배블록을 형성해 온 친일 세력과 탈법적 구테타 세력이 지배권력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봉쇄하고 정부 비판 인사,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 제거함으로써 국가 안보보다 정권 유지 수단으로 악용해 온 도구라는 것”(391)이다. 이 얼마나 명괘한 주장인가.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헌법제판소의 합헌 판결로 종결지어졌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폐지를 주장했던 이 법이 왜 헌법제판소의 판결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 미국의 건국 초기, 연방주의 교서에 나온 내용에 의할 것 같으면, 있는 자(유산자)의 계급은 소수였고, 없는 자(무산자)의 계급은 다수였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 여기서 지배계급의 두려움이 발동하는 데,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유산자의 지배논리가 무산자의 다수의견에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된 연방법원을 독립적으로 설치함으로써 투표로 입법된 법이라고 하더라도 분연히 잘라 거절해 버릴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도 오랜 세월 있는듯 없는듯 하던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어쨋든 그 '헌법재판소'는 분연히 일어나 절대 다수 국민의 의견을 전원 일치 판결로 일거에 날려 버린 셈이 되었다. 과연 이 기관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봐야 할 것이다.
지배계급의 숨은 의도와 폐해를 보노라면, 거기에 희생되어 살아가는 우리 소시민의 삶과 권리가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지며, 우리가 사회의 의제로 발의하여 끊임없이 감시와 비판을 소홀히 하지 않고, 그들의 사회적 책무와 도덕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임을 느끼게 된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기도 하고 기성세대가 마땅히 책임져야할 사회 자정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가 비중 있게 다루었다고 생각한 세 번째 것은 미국이라는 패권주의 국가의 자화상이다. 냉전 시대가 끝났지만, 테러와의 애매모호한 전쟁을 시작으로 더 많은 무기를 생산하고 세계에 퍼 나르고 있는 군사국가 미국. 우리는 그들을 ‘군산 복합체’라 부른다. “국민에게서 세금을 짜내 엄청난 규모의 국방비를 만들어 놓고 그 돈으로 극소수의 호주머니를 불려 주는 부패가 미국에선 아예 제도화돼 있는”(249)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은 또한 ‘범산 복합체’다. 감옥이 연방정부의 보조를 받는 민간 기업의 형태로 운영되다 보니, 이윤 추구를 위해 저임금 노동을 활용시킬 수 있고, 지배계급이 원치 않는 투표를 방지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가난한 흑인은 대부분은 공화당을 지지하지 않으니 투표에서 적극적으로 제외시키고, 재소자 수가 많다는 것은 사회의 불안 요인이 가중되었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인 공화당에 표를 몰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200만이 넘는 사람이 감옥에서 지낸다고 생각해 보라! 와 닿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나라 인천 도시 하나가 교도소라고 생각해 보라!
미국은 교토의정서에 반대하는 유일한 나라다. 이를 채택할 경우 자국의 기업에 입힐 손해가 극심하다고 변명 한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세계자원의 25%를 쓰고 있는 슈퍼 소비국가로서 그 책무를 너무 쉽게 놓아버린 이기주의적인 국가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어쩌면 그들의 지배적인 가치관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환경 위기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신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자본지배 논리 그리고 다음에 설명할 프런티어 정신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미국의 시대정신인 프런티어 정신은 좋은 말로 개척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국제적으로 난폭하게 구는 카우보이 기질과 그 바탕이라 할 인종차별주의나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삶”(309)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미국의 삶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설명이다 싶겠다. 예전에 소리엘이라는 기독교 복음송 가수의 6집 앨범에 「프론티어」라는 부제가 달렸었다. 물론 의미는 영적 변방에서 찾는 프론티어 정신이겠거니 싶지만, 혹시라 서구적 정신에 대한 사대주의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미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미국의 개독교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불리울 정도로 검은머리 미국인이 많은 나라다. 오히려 미국인보다 더 미국스러운 나라, 대한민국. 세계인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싶다. 훼손된 국가의 이미지는 누가 세울 수 있는가? 의연한 시민정신으로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할까? 신변잡기 지식으로 일관된 교양보다는 사회를 냉철한 비판의식으로 바라보고, 반성할 수 있는 교양을 겸비한 시민들이 많이 양성되어 사회의 가리워진 부분과 지배세력들의 음모를 양지로 끌고 나오는 일이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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