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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정치·사회

[북리뷰] 노오력의 배신 후기

by 체리그루브 2018.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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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의 배신

조한혜정,엄기호

창비, 2016

 

이 책은 청년 세대들 사이에서 퍼지는 사회 담론을 토론의 과정을 통해 엮은 것이다. 벌써 출간된지 2년이 지난 시점이라, 탄핵 이전 국면의 정서와 분노가 남아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작가 두 분의 글이 호소력이 있었고, 함께 참여한 다른 분들의 글은 지엽적이고, 파편화된 인식이어서 많이 공감되진 않았다. 청년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겪은 낯설음과 꼰대 세대를 비판하고 있고, '헬조선'이나 서로를 '충'으로 부르는 혐오의 기원을 다룬다. 그리고 청년의 주거 문제 해소와 해외 취업 등과 같은 대안 모색을 보여준다. 책 결론에서는 청년배당 제도나 1년간 해외 여행을 국가가 지원(이건 조금 황당했던 대목임)해 줄것 등을 제안한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대략적인 정서를 느껴보자.

 

지금 한국의 '잘나가는' 조직에서 사람을 양성하는 방식은 박하다 못해 가혹하다. 조직원을 보호하거나 귀하게 여기기는 커녕 전쟁터에 던져 놓고 살아서 돌아오기를 요구한다. 사람의 성장에 관한 한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표준'은 전쟁 모델이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강하게 커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사자를 훈련시키듯 후배들에게 현장은 전쟁터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용감하고 희생적이어야 오래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14)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나도 던져짐을 당하고, 살아 돌아가기를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른다. 베트남 전쟁 영화를 보면, 헬기가 군인들을 내려놓고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특히 프로젝트를 많이 다니다 보니,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기대하며 바라보는 고객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짧은 기간에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성장의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면서 사회는 다 그런 거 아닌가라고 익숙해졌던 것이 몇 해이던가. 해 볼만 하다고 다독여 가면서 이끌어보지만, 그들은 떠난다. "능력있는 선배들을 봐도 좀처럼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36)면서.

 

 

불평등이 불공정으로 둔갑한 사회에서 가장 공정한 것은 '살벌함의 공정함'이다. 누구도 살벌한 경쟁에서 면제되어서는 안된다. 살벌하게 경쟁해서 살아남는 것만이 공정한 것이며 그런 사람이 누리는 부와 명예는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리고 때로 칭송되기까지 한다. 이런 인식 속에서 차별은 정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것이 된다 .(20)

 

계속해서 살벌하다. 사회 첫발을 내디딘 청춘들에겐 모든 것이 살벌하다. 근데 살펴보면 그건 살벌함의 공정함이 아니라, 불공정의 만연함이었다. 지난 정권들에서 자행된 권력형 비리로 점철된 인사청탁 비리가 얼마나 많았었던가. 그 빙산의 일각이 강원랜드다.

 

청년실업 문제가 전지구적인 문제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메시아'적 해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그런 해법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해법이 있었다면 진즉에 그 해법이 '전지구화'되었을 것이다. (26)

 

메시아 해법은 없다. 그것이 정확한 안목의 시작이다.

 

'노력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산업화 시대의 명제는 엉뚱하게 뒤집어져 '가난한 사람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비난의 날로 돌아와 경제적 패배자를 사회에서 아웃시켜버린다. 이는 경제적 양극화를 넘어 내부자-외부자 간의 분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이중화의 문제이며 사회에서 배제당하는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는 기근보다 더 무섭게 청년들의 마음을 조여온다. (77)

 

자본주의 화폐경제가 가져다주는 트라우마가 청년들의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 이 책의 논지가 살짝 엿보이는데, 청년은 기성세대와 다르다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신자유주의적 훈련을 받은 '스펙 새대'는 창의적인 잉여질로 밤을 새웠던 '신세대'와 달리 '삽질'로 밤을 새운다. 그리고 지금 그 삽질이 보장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간파하고 '금수저.흙수저' 계급론에 절절하게 공감하기 시작했다.(199) 이것이 단군이래 가장 많이 배운 젊은 친구들의 결론이라니, 마음이 아프다. 더 나아가 조금 우려스러운 대목은 민주주의는 그만하면 됐으니, 더많은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외침이다.

 

이들의 헬조선 담론을 들어보자.

위기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세계경영을 주창하며 1990년대 신화를 써내려갔던 대우그룹의 공중분해와 김우중 회장의 해외 도피는 '한국이 망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IMF 구제금융 사태는 거의 모든 분야에 위기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그래도 '한국'이라는 국가를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위기를 통해 더욱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려 노력했다. 전국적인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어떻게든 국난 극복에 도움이되고자 했으며, 박찬호나 박세리 같은 스포츠 선수들이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열광하며 망해버린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아픔을 상상으로나마 위로받기도 했다.

그러나 뒤이어 가혹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금융 세계화가 본격화되고 모든 국영 부문의 민영화가 마치 절대적 대안인 것처럼 제시되었다. 그리고 비정규직.계약직 등 노동 유연화가 한국 사회 전반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개인들의 삶은 지나칠 정도로 축소되고 배제되었으며 삶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세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정규직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불안정한 비정규직과 계약직 일자리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언제든 대량해고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글로벌 금융그룹들은 자본을 투자한 거대한 건물들이 도시 이곳저곳에 우후죽순 생겨나는 속도만큼 많은 사람이 중산층에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윽고 경제.교육.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양극화가 별다른 저항 없이 완성되엇다. IMF 사태 이후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현재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한국이라는 국가를 '헬조선'으로 부르며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장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141)

 

공동저자는 이 젊은이들의 패닉이 정부가 아무 대책도 세우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려 버린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생활을 유지할 직업이 급격히 사라지는 '무업사회', 모두를 고립시켜 버린 '무연사회', 사람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려는 '무용사회'에서 탈존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감지한 청년들이 이제 대대적인 전환을 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94)

 

개인적으로 아래의 헬조선 담론이 더 많이 와닿는다. 이런 관점이라면 일면 해결책도 조금은 가까이 있을거라 여지는 면이 없잖다.

헬조선 담론은 망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청년들의 고발이다. 왜 하필 대한민국에 사는 청년들이 파국적 상황을 먼저 맞이하게 되었을가? 여기서 한국의 근대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영향권에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한국이 고도성장기를 거친 후, 탐욕의 자본주의화로 인해 인류최대 비극인 양차 세계대전을 치른 후 대대적인 성찰에 들어간 유럽 사회의 영향을 받기보다, 제국주의적 미소 냉전체제하에서 본격저인 근대화를 해갔다는 사실은 현재 한국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낀 유럽은, 전쟁의 폐허로부터 스스로를 복구하는 동시에 수정자본주의의 길을 택하게 된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 국가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북유럽 국민들은 경제 재건과 함께 근대에 대한 근본적 성찰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침략과 방어를 위한 강력한 국가가 아닌, 국민/시민들의 삶을 윤핵하게 하는 시민적 민주주의와 환대의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195)

 

청년들은 제대로된 기회없이 사회적 박탈감에 시달리다가 일종의 체념 단계를 지나, 혐오 단계에서 서로를 향해 벌레 취급하는 양상까지 치달았다. 서로를 "~충"이라고 부르는 모습 속에는 인간적 존엄은 철저히 배제됐다. 그런의미에서 다음의 문구가 경종을 울린다. 날짐승의 죽음 앞에서는 최소한 애도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벌레에게는 살생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귀찮고 성가신 존재이기에 오직 퇴치하려 할 뿐이다. (117) 기껏해야 우리때는 "식충"이가 다였는데, 요사이는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일면 우리는 모두 권력자들에게 하나의 벌레일지도 모른다. 마치 잠깐 빛나는 반딧불처럼 잠시 투표와 행동으로 시민적 요구를 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는 여론을 통해 오로지 군집화된 개체로 전락한다.(118)

 

결론이다. 우리는 강박적 공정함을 너무 강요한 나머지 여유가 사라지고, 치열한 경쟁만 드세게 살아 남았다. 근대에 대한 성찰의 부재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어쩌면 일찌기 <후불제 민주주의>와 결을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민주주의를 구축했고, 이에 따른 지불해야 할 몫을 시간이 지나고서라도 지불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라고. 아래 저자가 경험한 핀란드에서의 경험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보여준다.

 

몇 년 전, 핀란드의 산골 마을에서 열린 록 콘서트 현장에 갔었는데 표가 아주 비싼 콘서트였다. 그런데 콘서트장 옆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설치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담요를 깔고 밖에서 무료로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공연을 보고 싶은 열혈 팬이 공연을 성사키셨지만 이왕이면 다른 이들도 함께 곁불을 쬐며 축제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공연을 즐기기 위해서는 모두가 똑같이 고액의 입장료를 내야만 한다는 '강박적 공정함'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그 고액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호혜적 평등주의'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정과 환대의 원리로 삶을 조직하는 사회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런 호혜와 나눔의 감각이 있는 사회와 독점과 경쟁 원리로 삶을 조직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자원이 급격하게 고갈되는 시대에 어떤 나라가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지를 물어보면 답은 자명하다. (195)

 

 

 

 

우리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다른 세대를, 서로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이물질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청년에 대한 배려는 정책이 어떻게 해결해 주기 이전부터 우리가 실천해야할 "나눔의 감각"의 대상이다. 메시야적 해법은 없다. 내 이웃 청년들에게 배신감 들게 하는 사회는 최소한 되게 하지 말아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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