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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종교

[북리뷰] 예수의 무덤

by 체리그루브 200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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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기로 합의한 신화다."(10)

1980년 아파트 공사를 위해 발파 작업을 하다가 발견된 무덤에서 유골함 10기가 발견되었다. 그중 하나는 분실 된 상태였다. 이스라엘 고고학청에서 3명의 고고학자를 파견하여 이 유골함을 조사하였으나, 이들은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쓰인 유골함과, '마라라고도 하는 미리암네'라는 여인의 유골함을 보고도 별다른 추가적 조사 없이 무덤을 덮고, 유골함만 고고학청에 보내 보관하기에 이른다. 어떠한 추축이나 단정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훗날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귀에 들어가고, 그들은 여러 방송사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2004년 조사에 착수한다.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미리암네가 외경인 <빌립행전>에서 묘사한 빌립의 누이, 막달라 마리아 라는 하버드 교수의 의견을 듣고 예수의 유골함과의 관계에 큰 개연성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 학설 처럼 그녀가 프랑스 지방에서 죽었다는 것과는 달리 외경의 말을 따르자면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유골함 중에 또한 눈에 띄는 것은 '예수의 아들 유다'의 유골함이었는데, 이는 <도마 복음>의 도마가 쌍둥이란 뜻으로, 예수의 친구로 표현되는 막달라 마리아가 실은 그의 아내였던 것 처럼 아들임을 속이고자 하는 은폐적 의미의 수사 표현이 아니었을까 가정하기도 한다.

이들은 당시 발견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아직 붕괴되지 않은 예수의 무덤을 발견하고, 카메라에 예수가족 무덤을 담아낸다. 이 예수가 기독교가 얘기하는 그 예수일 확률은 보수적으로 잡아 600 분의 1이된다. 그런데로 통계적 확률을 확보한 셈이된다. '요셉의 아들, 예수'와 같은 이름이 당시에 흔했다고 쳐도, '막달라 마리아'나 '예수의 아들 유다'가 모두 한꺼번에 발견될 확률은 그만큼 적은 것이다.

이들은 유골함 속에 녹아든 녹청을 채취하여 DNA 검사를 의뢰한다. 물론 검사자는 이들 DNA가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결과로 배양한 미토콘드리아는 이들의 DNA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 즉,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는 모자관계도 아니요, 형제 자매 관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왜 이 두 사람이 한 무덤에 있다는 것일까? 저자는 부부관계일 것이라는 추측한다.

다음은 '예수의 형제 유다'의 유골함에 관한 조사다. 사라진 유골함이 어느 골동품 수집광의 장 속에 있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면, 이 예수 가족의 무덤의 일치 확률은 훨씬 줄어든다. 3만분의 1로. 이것을 위해 유골함의 녹청과 예수의 유골함 녹청을 비교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일치했다.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임을 밝혀낸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직접 보지 않았지만,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내가 아는 예수에 대한 믿음에 별 흠집은 날 것은 없었지만, 이 글을 통해 외경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거리두기가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라는 인물이 예수의 성스러움에 골치거리였기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사도 바울과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영지주의적 <빌립행전>,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도마 복음>과 같은 존재나 그 속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적 행위들은 바울의 비난의 정확한 표적이 아니었던 건지 의문이 가기도 한다.

어쨌든 이 책은 상당부분의 취재 뒷이야기와 그 과정을 담아냈다는 면에서 좀 지루했다. 무언가 서스펜스하게 엮어가길 원했던 저자의 의도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걱정했던 대로 큰 센세이션이 일어나진 않은 듯 하다. '역사를 뒤집을 고고학 최대의 발견'이라는 책 겉표지의 작은 소제목은 출판사 본연의 임무(?)였던 것일까? 해외에서는 이 이야기가 예수의 반전을 이야기 하는 최신 버전일 것이다. 1982년에 예수가 죽지 않고 프랑스로 이민하여 후손까지 낳고 살았다는 이야기에 비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실인 걸까? 아무튼 1982년 버전은 각색되어 댄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로 세간에 화재가 되기도 했던 것이니만큼 근본주의자들의 믿은엔 더없는 상처가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근본주의적 믿음의 형태를 취하는 우리나라 교인들은 좀더 성숙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부활, 불신지옥을 외치는 지하철의 한 전도자는 밉상스럽게 보면서도 실은 그들도 마음 속으로는 예수의 부활과 내세의 천국을 굳게 믿음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성경의 문자적 절대 믿음을 갖는다는 면에서 말이다. 인류의 기원을 실제 에덴 동산으로 믿고,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 이들에겐 이 책은 거부되어야할 이단의 변종적 증언으로 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예수를 바라보고 정말 그와 같은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하는 것에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두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의 죽음에 대한 확대 해석과 바울의 교리를 따르기 보단, 단순히 예수가 사랑으로 생애를 살아갔다는 것과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품었던 그 삶의 방식과 그 이면에 있는 그가 믿던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 말이다. 예수의 삶을 본받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좀더 의미있고 풍요로울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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