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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종교

[북리뷰] 그리스도의 탄생

by 체리그루브 2009.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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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의 죽음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저마다 예수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한 예수의 능력이 뒤따르지 않자, 제자들은 예수를 서서히 돌아선다. 갈릴리에서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해 그의 사상을 전파했으나, 많은 무리가 그를 등진 듯 하다. 그리고 또 최후의 만찬 때에도 그러하였다. 성화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는 다르게 예수는 매우 많은 제자들에 둘러 쌓여 식사를 하였을 것이고, 그의 생각한 바 “사랑”을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로마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민족적 굴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제자들에게 당연히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때 떨어져 나간 그룹이 가룟유다로 대표되는 그룹이었던 듯싶다. 예수의 제자들은 상징적 숫자인 12명 보다 훨씬 많았었을 것이며, 베드로나 가룟유다와 같은 인물들은 어쩌면 집단적 성격을 띄고 있는 제자 군의 대표일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끊임없이 그를 경계하던 주류 종파인 사두개파에 의해 로마에 신고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2. 괴롭고 긴 밤

예수가 심문 받던 날, 예수 이외에는 그 어떠한 제자도 피를 보지 않았다. 어찌된 것일까? 제자들이 중의회와 목숨을 담보로 한 모종의 거래를 했었던 듯싶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대가로 더 이상 그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제안을 제자들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부인의 대가로 자기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자책감으로 인해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죽기 전에 뱉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목이 매어왔을 것이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의 놀람과 충격 뒤에 따르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예루살렘 외각에 모여 예수에 대한 회상과 그가 한 말들을 서로 나누며, 스승의 사상을 추억한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을 넘어서 자신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제기된 의문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필사적 토의의 결과물이 되었을 것이다(27). 그것이 현재까지 전승되어오는 복음서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 많은 성서 신학자들의 중론이다.

이들은 히브리성서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의 시구에서 예수를 찾았고, 그들은 그 예언이 들어맞는 데 놀란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가 그 예언을 몸소 실천하고 성취시킨 점에서 억센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31). 이때부터 제자들의 마음 속에 되살아 난 예수는 예루살렘에도 나타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고, 갈릴리 호반에도 나타났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 후에도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된다. 제자들의 경험은 더욱 확장되어 예수가 그들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위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들의 허물을 짊어지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가 이사야 서에 제기된 대로 소생하여 자기들 곁에 재림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기 시작한다.

3.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 유월절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례객들 사이로 몰래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갈릴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의 형제들과 갈릴리 이웃들을 만난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이야기 하고, 그들이 얼마나 예수의 생각과 말씀을 자기들 기준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들에게 귀 기울인 사람들은 소박하고 가난한 호반 사람들이었으리라. 최초의 초대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여기서 시작한다. 즉, 예수의 재림을 원하는 자, 믿는 자들이 그들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전이나 율법 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예수의 가르침 보다는 주류 종파인 유태교의 흐름 속에서 제자들은 생각을 정립해 나갔다(48). 이는 베드로와 손잡은 예수의 사촌 형제 야고보가 강직한 유태교도였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호반에서 결성된 그룹은 그들의 가족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게 된다. 아마도 그들은 다시 오실 그분을 예루살렘에서 뵙고자 했을 것이다. 또한 그곳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추억이 생생한 장소였기 때문이리라. 이들의 출현은 당시 주류 종파인 사두개파에겐 별로 신경 쓰일 일이 아니었던 듯싶다. 율법과 성전을 부인하지 않는 한, 그리고 국가 체제 전복에 힘쓰는 종파가 아닌 이상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 탄압사건과 최초의 분열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이 사도 그룹은 당시 여러 종파 중 하나로 “나사렛인” 이라고 불렸으며, 유태교 전통에 따라 “성전”과 “율법”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종파는 철저히 유태인들 안에서만 포교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종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성난 하나님과 노여움, 심판의 하나님과는 달리 “단절된 신과 유태인과의 중개자로서의 예수의 이미지”(58)를 갖고 있어 훨씬 친근감 있게 사람들에게 다가 갈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생전의 제자들과 예수 혈연만의 조그만 공동체였으나 이제는 제법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 교단의 경제생활은 원칙적으로 공동생활을 하며 먹는 것도 배급제를 취했다고 한다. 교단의 유지비는 기부로 이루어졌으며, 각자의 사유제산도 인정되었다.

이들 공동체의 생활은 곧 사두개파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예수를 부인했던 자들이 다시 그를 전파하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는 소식. 사두개인들은 곧 중의회를 열고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하여 되돌려 보낸다. 사두개파는 부활과 재림을 믿지 않는 종파였던 탓에 “나사렛인”의 가르침을 금지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이 성전과 율법을 부인하지 않기에 별다른 조치를 취할 길이 없었다. 이때부터 사두개파는 “나사렛인” 종파를 핍박하였고, 예수에 대한 신앙은 핍박을 통해 더욱 확장되어 갔다. 예수는 “사랑의 의인”에서 점점 더 “메시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신앙이 고양되어갈수록 “예수와 성전과의 관계” 는 점점 미묘한 것이 되어갔다(70). 예수를 죽인 사두개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성전에서의 제사가 과연 예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물음이었다. 이것은 분명 사두개파에 대한 도전이었다.

5. 강한 스데반, 약한 베드로

“나사렛인”의 교단에 참여한 “그리스 말을 하는” 유태인들은 초기엔 힘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로 그 숫자가 많아 짐에 따라 이들의 목소리도 커져갔을 것이다. 이들은 교단의 살 길만을 급급히 여겨, 진정으로 예수가 외쳤던 훌륭한 개혁자 정신을 져버린 사도들을 겁쟁이 집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사두개파의 압박에 두려워 교단 유지에만 급급해 “성전”과 “율법”을 중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공동체는 서로 갈라서게 된다.

사도행전에서는 스데반이라는 인물과 그의 설교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곧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에 거할 분이 아닌 것과, 성전과 율법으로 인간을 옥죄고 자신들의 실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두개파를 비난했다. “오히려 사막의 한 가운데 막사 안에서 신을 마음 속으로부터 예배하던 정신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성전이 아닌가”(80) 하고 주장했다. 사두개파는 스데반을 학살하고, 대노하여 사도들을 제외한 “나사렛인”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왜 사도들은 제외되었을까? 그들은 이미 그전에 이 “그리스 말을 하는” 유태인들과 결별했었기 때문이리라. 누가는 그의 저서에서 스데반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동일 시 하고 있어, 사뭇 이 죽음에 대한 사도들의 두 번째 배신을 시사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베드로 등 사도 일행이 겁쟁이에서 마침내 강자가 되기까지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를 사도행전은 조심스럽게 암시적으로 전하고 있다”(87)

이 공동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동한다. 유태교를 부인하고 모세 5경만을 믿는 사마리아인들은 이들 유태교로부터 추방당한 이 이산 그룹의 정착과 포교를 허용한다. 스데반의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합류하고 이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이방인 신도들에게도 포교하기 시작한다. “크리스챤”은 이때부터 시작된 이방인 신자를 일컫는 말이 된다.

6. 율법, 그 두터운 벽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 사후 2년이 지나 발생했다. 그만큼 무력한 예수는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 이미 널리 알려진 터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일조한 엘리트 청년 사울은 스데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의 위선과 거만만을 깨닫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너무도 명확하게 꾀 뚫어 보고 있는 스데반의 눈빛이 싫었던 것이다. 사울의 비극은 여기서 드러난다.  그리스도교 신도들에 대한 그의 핍박은 실은 자신이 율법을 믿을 수 없게 된 데에 대한 채찍질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율법이냐 예수냐”의 갈등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고민은 그의 많은 서간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는 다메섹에서의 종교적 체험을 통해 비로소 “바울”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나사렛인” 그룹에 투신한다.

7. 두 번째의 핍박

바울이 개종한지 3년 후 로마에는 가이우스 즉, 갈리규라가 즉위한다. 광적인 갈리규라는 자신에 대한 예배를 모든 지배국에 강요했고, 로마 지배의 굴욕을 참아오던 유태인들은 심히 분노했다. 그리고 가이우스의 제단을 유태인들이 부숴버림으로써 사건은 로마와 유태인간의 긴장으로 치닫는다. 물론 복음서는 직접적으로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 않으나, “말세”의 위기감을 완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로마의 군단이 몰려오고 있다는 위기감으로 인해 당시의 그리스도교단은 숱한 개종자를 획득했을 것이며 크리스챤과 유태교인 간의 일치된 단결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의 전운은 갈리규라가 암살됨으로써 일단락 되었고, 유태인들은 철수하는 로마군을 보며, “승리”, “야훼와 그 율법은 역시 옳았다”는 생각을 관철시키면서 민족의식과 결부된 배타성을 더욱 키우게 된다. 이로써 율법에 대한 준수와 성전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해진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교단에는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정치적으로도 갈리규라와 친분이 있었던 아그립바는 유태인들의 원성을 잠재우고자 예루살렘 내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사도그룹을 향해 핍박을 가하면서 유태교도들의 호응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율법을 경시하는 듯 보이는 베드로파 중 한 사도를 처형한다. 베드로는 감옥을 탈출하고, 이를 계기로 이 그룹은 다른 나라에서의 포교에 힘쓰게 된다.

8. 제자들과 바울의 차이

예수의 일상생활을 지켜본 옛 제자 그룹은 대부분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율법을 지키고 성전을 참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산된 신도들은 예수의 생전을 몰랐던 만큼 율법을 초월하며 살았던 예수의 의지를 계승하려고 했을 것이다(127).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교단에 나타난 두 가지 예수관을 시사한다. 1차 예루살렘 회의는 바울을 통해 포교된 안디옥 교회에 대한 적절성 여부에 관해 “어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신도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주제에 대한 난상 토론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한 바울의 논리와 예수관은 감히 어느 누구의 반박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생애 보다는 “죽음과 부활”에 더 중점을 두었다. 바울로 인해 새로운 그리스도론이 유태교의 테두리 안에서의 그리스도론이라는 껍질을 깨고 태어나려던 장소 –그것이 예루살렘 회의였다(140).

9. 두번째 분열

베드로는 이방 선교에 대한 바울의 입장에 동의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베드로의 태도를 보고받은 야고보는 경고의 사자를 보냈고, 베드로는 이방인과의 식사를 그만둔다. 바울은 베드로의 허약한 성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율법의 초월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 믿고 있는 바울에게 베드로의 행위는 신앙적 배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당시 유태인에게 있어 선민 사상은 이방인과 엄격히 구별되는 그들만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의 식사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까지 여겨질 터였다. 이리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파는 바울의 그리스도교를 전폭적으로 승인하지 않았으며 바울도 바울대로 자신의 그리스도교를 고집하여 타협하지 않았다(148).

바울은 베드로를 신뢰할 수 없었고, 이방인에 대한 포교를 위해 실라와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아테네의 그리스인에게도 포교를 했다. 그러나 실패한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로 이동하여 교회를 세웠고, 꽤 성공한 듯하다. 아마도 아테네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식인 계층이 아닌 가난한 사람을 대한 듯 하다. 하지만, 이도 곧 분열에 휩싸인다. 바울의 가르침에 반박하는 무리가 생긴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된 설교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는 예루살렘 교회측의 비난과 반대로 사도에게는 신학적 지식이 없다는 바울의 주장은 초대 그리스도교단에 아직 통일된 그리스도관이나 교의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0. 모든 길은 로마로

바울은 이방인들의 조소와 유태인들의 핍박, 그리고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질투나 방해를 받으며 선교를 감행 해야 했다. 어쩌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주위 사람들에게 선의의 상처를 안겨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에베소에서 바울의 포교는, 은세공 직공들이 자신들이 만든 작은 성전모형의 매출에 차질을 줄까 하여 바울 일행을 핍박하기 시작하는 것으로써, 제재를 받는다. 에베소 시민들의 필박은 날로 심해졌다(163).

자기의 그리스도교와 자기의 그리스도관에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바울은 이들 ‘거짓 형제’과 싸워 오기는 했지만 본심으로 예루살렘 제자 그룹에서 이탈할 마음은 없었다. 따라서 화해를 위해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이미 그를 전에 본 적이 있는 유태교도들에 의해 발각되고 바울은 피투성이가 되어 로마 진압군에 의해 구출된다. 이후 바울은 미결수로 로마로 옮겨진다. 확실히 바울의 신앙이나 신념만은 제자 그룹도 인정했을 것이지만 겨우 이룩된 교단조직에 언제나 혼란만 야기시키는 이 귀찮은 사나이는 적잖이 두통거리였을 것이다(172). 하지만 바울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예수는 왜 비명에 가야 했는가라는 충격적인 의문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후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나 이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 보인 것은 바울뿐이었기 때문이다.

11. 베드로의 죽음과 바울의 죽음

58년 네로 즉위 5년 되는 해. 로마는 비교적 종교에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유태교나 그리스도교 만큼은 상당히 색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보았다. 로마를 네로의 기호에 맞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재건의 목표였는지는 불분명 하지만, 불이 엿새 동안 계속 일어나 로마가 불바다가 되는 사건이 터졌다. 네로는 이 사건의 방화범이 그리스도교도라고 단정함으로써 이들을 잔인하게 처형하기에 이른다. 바울도 미결수로 로마에 남아있던 중 이 기간에 죽은 듯 하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왜 바울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그리스도교가 반로마적 성향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한 문서이기에 민감한 사항인 바울의 마지막 이야기를 애써 외면한 이유도 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용감 무쌍했던 바울이 너무도 허무하게 죽어갔기 때문이리라. 그만한 신앙인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죽음을 맞이 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과 허탈함과도 같은 광경인 것이다. “그는 어째서 그토록 무참한 죽음을 신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던 것인가?” (186)

바울이 비참한 죽음을 맞기 1년 전인 61년에는 비교적 보수적 성향을 지닌 예루살렘 교회의 야보고 조차도 율법의 위배 명목으로 사형을 당한다. 우리는 그만큼 예루살렘 초대 그리스도 교단이 사두개파를 불안하게 할 만큼 커다란 확장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베드로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우리들이 분명히 말할 자료는 아무 데도 없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그가 로마에 가서 순교했다고 한다. 이 시기 예수의 제자 그룹은 모두 순교를 당한다.

예수의 제자들의 죽음 절망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오기로 했던 메시야는 오지 않았다. 이 절망감은 예루살렘 뿐 아니라 각지에 퍼지시 시작한다. 이 초대 그리스도교단의 심리적 위기는 히브리서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신앙의 위기에서 탈락한 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남은자들은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비밀을 어떻게든 믿어야 했다.

12. 침묵의 신, 재림하지 않는 그리스도

로마의 유태인의 탄압 정책의 강도가 높아가자 유태인들 사이의 불만이 높아만 갔다. 그리스도교단은 무거운 정치정세를 보내며 세계의 종말을 고하는 전조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결속을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태인들의 폭발이 일어났고,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한 로마군의 만행은 부녀자를 포함 3,600명을 살해한다. 이에 유태광야의 마사다 성을 과격파 유태인이 습격하여 로마 주둔군을 전멸시킨다. 오랫동안 굴욕에 참아 온 유대인들은 마침내 궐기했다.

유태인은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까지나 이길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곧 유태 예언자들이 말하는 신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반드시 구해줄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67년 봄 6만 병력의 15군단이 안디옥에 주둔하여 내려온다. 곳곳에서 유태 게릴라들과 접전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서서히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왔다. 69년 네로가 사망하자 담당 사령관이었던 베스바시아누스는 아들 다디우스에게 최후 공격을 위임하고 로마로 향했다. 70년 봄 로마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유태인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성벽도 파괴되었고 로마군은 성큼 다가왔다. 로마인에게도 유태인에게도 큰 피해만 준 전쟁이었다. 이에 다디우스는 전법을 바꾼다. 이른바 ‘기아작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을 막고 그들이 기아에 허덕일 때까지 성벽 밖에서 기다린 것이다. 유태인들은 기아에 허덕이기 시작했고, 가죽 띠나 구두도 먹어 치웠고 심지어 아기도 먹어야 했다.

고요한 야밤에 로마군 20여명이 미로 같은 예루살렘에 침투한다. 원군의 도착으로 예루살렘은 백병전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찌르고 죽이고, 쌓이고 넘어가고. 그러던 중 성전이 불에 탄다. 메시아가 오리라고 고대하던 유태인들은 허망하여 주저 앉는다. 메시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현실은 그들이 신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다(204).

포로가 된 유태인 9만 7천명은 각지로 흩어져 노예로 전락한다. 예루살렘 제자 그룹의 소멸 내지 쇠퇴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성격은 이때부터 일거에 180도 전환을 하기에 이르렀다(209).

13. 예수의 불가사의, 불가사의한 예수

오늘날 우리들이 읽는 복음서의 예수 수난담은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제기된 수수께끼를 필사적으로 풀려고 한 흔적이다. 그리고 이 예수의 문제는 신도들에 의해 신격화 된 것인지 아니면 바울의 주장대로 신이 인간이 되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전에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예수는 틀림없이 로마 점령 하의 유태의 한 예언자, 한 랍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앞선 오랜 시대, 이러한 랍비는 유태 속에 적잖이 등장했었다. 하지만 그런 어떤 인물도 예수와 같이 신격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예수에 관한 설화나 신화는 그의 사후 10년도 채 안되어 이룩된 것이었다. 신화의 성립과정을 생각할 때, 어떻게 이처럼 짧은 시간에 이루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당시 유태라는 풍토에서는 어떤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가를 알아두어야 한다. 야훼 이외의 어떤 것도 신앙하는 것을 엄하게 금한 이 유태에서 한 사나이가 신격화 되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225).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문적 성과는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이력으로 전해온다. 메마르고 건조한 예수에 대한 묘사를 통해 나는 좀더 풍부한 상상력으로 연출된 인간 예수를 보고 싶어했다.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탄생>이 내게 그 목마름을 충족시켜 준 책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인간 예수가 어떻게 신격화 되었는지에 대해 더욱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한 의문에 예수의 신성 형성과정을 초대 교회가 당면한 수수께끼와 같은 예수의 처절한 죽음을, 제자들의 신앙을 출발점으로 하여 보여주고 있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와 이스라엘의 다윗 왕국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상적인 국가로 대표된다는 것이리라. 이상적인 국가만큼이나 신학교에서 중요시 되는 것 중 하나가 ‘이상적인 교회’이다. 그리고 신학교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라!”고까지 가르친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공동 생산에 공동 분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짤막한 이야기는 이렇게 교회의 바른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그런 이상적인 초대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저자가 학문적 성과들을 고려하여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근거 있게 접근했다면 다음과 같은 정황적 증거는 타당하다 하겠다.

첫째, 당시 초대교회는 내부적으로 신앙의 통일성을 갖추지 못하고, 혼란스러움과 배타성을 함께 안고 가야 했다. 초기 형성과정에서, 전도는 유태인들 안에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율법과 성전을 준수하자는 그리스도교인과 그것을 극복해야한다는 그리스도교인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는 핍박하고 내쫓는 관계로 치달아 오늘날 보여주는 교회들의 분열양상과도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보수 기독교의 거룩한 투쟁에 희생되어 교회 밖으로 내몰리는 진보적 기독교의 모습이랄까?

둘째, 성전에 대한 인식의 오해가 오늘날과도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스데반 설교로 대두되는 당시 유대교의 주류 종파인 사두개인이 장악하고 세운 성전과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분이 아니라고 하는 그의 고백에 대해, 당시 초대 교인들의 보수파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를 죽인 기득권 층인 사두개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보수 기독교는 잠잠히 성전에 대한 그들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다. 오늘날의 예배당의 이미지는 마치 당시 화려했던 사두개인들의 성전과 닮은 꼴이 많아 보인다. 오히려 스데반이 참된 성전으로 지적한 광야의 초라한 텐트에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참된 성전의 의미는 사라진 것인가?

셋째, 공동생산 공동분배에 대한 특별히 더 보충된 표현이나 보편성이 없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단면으로 우리는 이 미화된 모습을 보편적으로 이상화 시키곤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다른 여러 교회의 모습 중 일 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런 공동체들이 교회의 무리 말고도 쿰란 공동체와 같이 다수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의 형편과 지향해야 할 목표로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은 희년 제도만큼이나 그 효용성이 크게 입증되지 않은 단기간의 교회운동이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을 대하며 큰 수확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약 성경 속에서 흐르는 미묘한 세 가지 견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예수의 사촌 야고보파로 대표되는 이들의 견해들이다. 아직 성경을 펼쳐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바는 아니나, 성경 구석 구석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 하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은 이들의 신앙 고백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은 이산 그룹을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몰아내는 악역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목숨과 신앙을 지킬 수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들려오는 이산 그룹의 확산 소식과 그들의 포교 성과에 내심 자신들의 전통이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이산 그룹이 이방인과 포교로 인해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신의 지위도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심히 불안했을 것이다.

둘째는 바울로 대표되는 예수의 그리스도론적 견해이다. 그는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와 함께한 제자가 아니었기에 늘 전통적 사도의 아웃사이더로 인식되어야 했지만, 그의 신학만큼은 제자들보다 훨씬 체계적이었고, 확신에 차 있었다. 바울 그룹은 율법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몽환선생으로써 궁극적으로 율법에 대한 준수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예수 앞에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으라고 주장한다. 그의 사상은 신약의 다수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의 서한들의 정황 이해에 이 책에서 얼마나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는지는 또 다른 수확이랄 수 있겠다.

셋째는 야고보와 바울의 중간입장으로 대두되는 베드로파 견해다. 나약한 존재로 표현되는 이들 그룹은 야고보 그룹과 바울 그룹의 중간적 입장에서 화해해 보려고 시도하지만, 도리어 서로에게 실망만 얻은 체 별 달리 효과를 얻지 못한다. 이들의 견해는 어쩌면 성경을 읽어가면서 발견하기 매우 힘들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자면 그것은 곧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의 견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약한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와 닮은 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두 견해를 수용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저자는 초라한 예수가 신성시 되는 과정 속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세 가지 의문을 내던진다. 첫째, 예수는 로마 점령 기 작은 유태의 한 랍비였다는 것. 둘째, 예수에 관한 설화나 신화는 그의 사후 10년도 채 안되어 이룩됐다는 것. 마지막으로 당시 유태라는 풍토에서는 어떤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 이런 불가사의한 토양 위에 굳건히 2,000년을 흘러온 예수의 신앙은 과연 무엇인가를 틀림없이 그 예수라는 인물로부터 발산된 추억과 생생한 기억들 속에 어떤 놀라운 힘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왠지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 더욱 주목 하여 그의 신성 저 안쪽에 위치한, 진정으로 성경이 보여주고 싶어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을 느끼고 싶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인간 예수가 품었던 신앙, 예수의 신앙을 품고 살아가길 소망하면서 나는 그를 둘러싼 감추어진 그날의 정황을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확인해 본다. 어쩌면 이것은 미드라쉬라는 랍비들의 문학 장르의 연장으로도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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