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께서, 억압의 전제적 구조와 정의의 외침에 귀기울이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현재의 지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을 그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976년 6월 16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불의한 통치의 종식을 위한 기도"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정부군대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건한 자들은 기도가 당파적 정치적 목적에 이용된 것에 놀라고 당황해했다. 그러나 과연 기도와 같은 '영적인 문제'는 정치와 같은 '해방의 문제'와 분리되어야하는가? 이 책은 상호 배타적인 두 개념을 전혀 다르게 접근하여 세 가지 오해의 소지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결국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제1부 : 파괴
제1장 대오류(The Great Fallacy) :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양성
거룩-세속, 기도-정치, 신앙-업적, 철수-참여, 교회-세상, 영원-시간, 이론-실제, 종교-윤리, 영혼-육체, 개인-사회, 영-육, 거룩-비속, 하늘-땅, 신적-인간적, 영성-해방 등 이들의 대립은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우리 삶에서 좋은 해명의 도구라기 보다는 반대로 우리 삶을 왜곡시키고, 세상을 오해하도록 할 뿐이라는 데, 이 '대오류'가 있는 것이다.
초기 유대주의에서는 이 영과 육에 대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시대에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이 창궐했다. 이 세계관에서는 영혼은 선하며, 육은 부패했다고 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영향으로 두 가지 방식의 기독교적 삶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가난과 순결과 순종을 맹세한 후 악한 세상을 떠나 수도원과 암자에서 생활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도살업자, 빵 굽는 사람, 양초 제조업자들로서 앞서의 은둔자의 기도에 의지하면서 악한 세상에 머물러 사는 방식이다. 이 '대오류'의 전형적인 예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피해 지상 위에 있는 신적 영역을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세례식의 한 구절에도, 수많은 개신교의 찬송 등에도 나타난다.
어째서 이 '대오류'는 그토록 기독교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기독교의 전통 속에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도전할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과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혹은 교회적이든, 혹은 세 가지 전부이든 권력을 가진 사람의 관심은 그 권력을 지속하는 데 있기 때문에 도전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재로 제3세계 독재자들은 민중이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개념을 아는 것을 경계했다. 그들은 "네 운명을 받아들여라. 육체적 중노동 가운데서 영적 해방을 찾아라"고 설교하는 목사를 치하했다. 이는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치는 보수 교회의 외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에게 있어 (영이 아닌) 육적 해방은 복음을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칼 맑스로 대치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대오류'는 우리에게 호소하는 현재의 굴레(사태)에 우리가 도전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작은 집단이었으나 4세기가 지난 후에는 정치와 종교가 너무 혼합되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국교 승인 이후에는 국가 정책이 종교의 재가를 받기 시작했다. 십자가 깃발 아래 정복전쟁이 행해졌고, 권력의 단맛은 마침내 교황까지도 자신을 위한 군대를 지니게 했다. 1960년 미국의 "자유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월남전 개입을 반대했을 때,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와 정치는 혼합될 수 없다"는 슬로건으로 이를 반대했으나, 10년 동안 많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안건들, 낙태반대의 입법화, 공교육 기도문제 등을 관철시키기 위해 로비활동을 해왔다. 즉, "종교와 정치는 혼합될 수 없으나, 나의 정치는 혼합될 수 있다"는 거다. 이처럼 '대오류'는 보수주의적 입지를 강화시켜왔고, 도전을 막아왔다.
제2장 대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 : 계획A와 계획B
두 개의 매우 다른 세계는 우리를 편치 못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둘 중 한 가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자주 하듯이) 다른 입장을 무시, 웃어 넘기거나 완전히 폐기하는 것(계획A). 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입장을 취합해 최상의 것들로 통합하는 것이다(계획B).
계획A 방법을 살펴보자. 계획A 방법은 다른 말로 폄하적인 생각을 품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선 (해방에서 바라 본)은 영성에 대한 폄하 입장으로, 영성은 도피적며 개인주의적인 특정 소수의 사람들이 늘 사회적 관심을 적게 갖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반면, (영성에서 바라 본) 해방에 대한 폄하 입장으로, 해방은 세속적이며, 지나친 공동체 지향적인 사람들이 부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뿐만 아니라 내면적 수양도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다음으로, 계획B 방법을 살펴보자. "영성은 종교적 삶에 기본이며, 해방의 기여로 인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입장과 "해방은 종교적 삶에 기본이며, 영성의 기여로 인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온전한 영적 삶을 산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이웃을 향해 우리 자신을 내어줄 수 있게 된다"는 입장과 "사회적 참여로 인해 우리는 영적 풍부함을 느낄 수 있다"는 입장으로 나뉠 수 있다. 이 방법이 계획A 보다는 바람직한 방법이긴 하지만, 계속적인 종교적 분열증만을 인정할 뿐이며, 단순히 문제를 바꾸어 말한 것 이외에는 본질적 해결책이 못된다.
제3장 명료화 : "물러남과 되돌아옴"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 보자. "물러남과 되돌아옴"의 방법이다. 일상의 혼잡으로부터 "물러나는 것"과 영적으로 깨달음을 갖고, 일상의 삶으로 다시 "되돌아옴"의 방법이다. 이는 성서에서도 보이는 바, 모세의 광야 체험이나, 예수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갔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진정한 목적은 "물러남"이 아니라, "되돌아옴"이다.
우리는 "물러남"을 영성으로, "되돌아옴"을 해방으로 나누어 생각할 소지가 있다. 해명이 필요하다. "물러남과 되돌아옴"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을 다른 두 세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변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단일 세계의 한 부분에 잠시 집중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물러남과 되돌아옴"에 관련된 요점은 어딘가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지금 여기로 모셔옴으로써 전에는 몰랐던 의미를 다시 발견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흥미 있는 그 발굴작업에 참여함으로써 전에는 "저 밖에" 계셨다고 믿어졌던 하나님이 이미 "여기에" 계시다고 하는 사실과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깨달음에서 멀어지게 한 것은 단지 우리들의 약해진 시력(또는 우리의 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력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물러남과 되돌아옴"의 리듬이 계속적으로 우리 삶을 구성한다.
제2부 건설을 위한 실마리
제4장 혼란 속에서의 실마리 : 성서
(영성과 해방은 별개의 것이라고) 대오류를 믿는 사람들은 성서를 대함에 있어서도 고귀함과 신성함을 부여한다. 그들에게 성경은 검토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 성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잡담들과 루머와 공상, 훈계와 긴 편지들… 살인, 강간, 지루한 법령과 족보들로 가득하다. 성경은 지상의 세속적 독서에 대항하는 "영적인" 책이 아니다. 우리는 도리어 성경 속에서 "세속에 참여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은 파라오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편에서 발견되며, 나단을 통해 다윗의 간통을 책망한 곳에서 발견되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편에서 하나님은 발견된다. "성서는 매우 세상적인 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매우 세상적이기 때문에"(75)
우리는 성서의 메시지 중 '구원'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알고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서의 구원이 두 가지 면에서 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하나는 "구원이 인간 전체(영성과 해방)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인데, 대개 영적 부분만을 주로 다룬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구원이 개인적 실재보다는 공동체적 실재를 취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구원은 너무 개인적 구원으로만 생각되어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과 많이 다르다.
"구원이 인간전체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의 치유이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치유이적은 단순히 영적 구원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건강의 회복과 죄의 용서를 다루었다. 성서적 의미에서 "인간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영혼의 상태"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사람들의 쌀독에 쌀이 다 떨어졌는지(일상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구원이 공동체적 실재를 취급해야한다는 것"은 성경의 한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팔레스틴 국세청 직원인 삭게오가 잘못을 깨우쳤을 때, 그는 "이제부터 산에 들어가 수도생활로 기도와 명상의 생활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당장 착복한 것의 4배를 갚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함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란, 정의와 수탈한 재산의 회복에 기초한, 공동체와의 새로운 관계회복이라는 인식을 삭게오에게 보여 준 것이다.
농촌 출신 예언자 미가는 권력을 장악한 도시인들이 농민들을 속이고 수탈하며 그들의 토지와 농작마저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가는 미가 6장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법정에 이스라엘을 불러 세우는 방법으로 문제를 접근했다. 이에 이스라엘의 응답은 하나님의 비난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검사를 매수하듯이, 하나님 앞에 최상의 희생양, 보다 많은 송아지, 맏아들을 바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고소를 면하고자 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가서 6장 8절은 이런 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잘못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을 바로잡을 것인가?" "그렇다면 들어라 야훼께서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즉 정의를 (의롭게) 행하고, 자비를 베풀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리더스다이제스트』처럼 "도덕적 회복을 위한 손쉬운 세 가지 방법"의 요약이 아니라, 기실 세 가지가 모두 동일한 의미란 것이다. 곧 의롭게 행한다는 것은 자비 없이는 불가능하며, 우리가 아는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편에 계시다는 의미다. 이러한 사실에는 저 '대오류'가 용납될 틈이 없는 것이다.
제5장 실마리의 명료화 : 화육
히브리성서에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주장은, 히브리인들의 수많은 비극적 역사 가운데 좀처럼 승리가 보이지 않았던 역사를 이해하는 노력에서 연유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삶과 죽음을 체험한 후 얻은 사색적 결론이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확증하게 된 시기는 더 후대에 이르러서다. 이 창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는데, 창조물은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하다는 것.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것이기에 사랑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명백한 표시들이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너무 무질서하고, 악하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잿더미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보내실 메시야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수세기 동안 메시야가 어떤 분일지 추측되었고, 전사(戰士)거나 왕이나 다윗 왕의 후손, 또는 목가적인 목양자와 같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후대에 마침내 "고난 당하는 종"으로 메시야에 대한 개념이 전통 속으로 자리잡게 된다.
유다 역사에서 형편이 어려워질 때마다 메시야에 대한 대망은 극에 달했다. 힘있고 호소력 있게 활보하던 이를 보고 그들은 메시야라 믿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볼품없이 패배하거나 엉터리 협잡꾼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일단의 적은 유다인들이 떠돌이 랍비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력도 없고, 권력자와의 유착도 없는 면에서 평범한 유다인과 다를 바 없었다. 짧은 공적 생애 끝에 "반란죄"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과 가르침과 신념은 죽음조차도 파괴시키지 못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그분이야 말로 기다리던 메시야라 믿게 된다. 그가 "요세프의 아들 요슈아", "요셉의 아들 예수"인 것이다.
4복음서(요한복음)는 "로고스"(신적인 것)가 불순한 "육"이 되었다는 사실을 헬라문화권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예수를 전한다. 메시야의 희망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이 "화육"의 개념은, 예수를 죽인 유다인들을 "신을 죽인 족속"으로 치부시켜, 오랫동안 유다인들을 핍박하는 근거가 되어왔다. 이는 메시야 사상을 같이 물려받은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깊은 갈등을 낳았고, 기독교 유산에 있어 명예롭지 못한 부분이었다. 예수의 화육은 신적으로 모든 걸 초월해 보이지 않았다. 초라한 마굿간 출생에, 못질 하나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목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스스로 체현한 랍비의 모습을 보여줬다.
"영성"과 "해방"의 통합은 예수의 사역에도 나타난다. 그는 제자들에게 안식일의 규례보다 배고픔을 먼저 채우도록 했다. 5천명을 먹이신 이적에서 그는 "영적" 금식을 택하지 않고 청중의 배고픔을 채우도록 했다. 유월절 축제때, 예수는 전통적 훈련(기도, 명상, 금식)이 아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었다. 공교롭게도 예수의 사역은 먹는 것과 관련을 많이 맺었다. 예수의 윤리적 계산법에 의하면, 참된 삶에 관한 마지막 시험의 하나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영성"과 "해방"의 통합은 예수의 말씀에도 나타난다. 그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알려거든 세상을 향해 등을 돌려라" 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의 코앞의 당면한 문제(세속적 문제)를 예화로 들어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고 주장을 했다. 즉시로 변화가 일진 않았지만, 일상의 의미가 새롭게 보였다. 매우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사회적 장벽이 보였다. 탐욕으로 구축된 경제적 장벽, 공포로 조직된 핵무기 장벽, 각종 특혜의 장벽 등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제6장 실마리의 행동화 : 예배와 성례전
원래 예배의 의미는 어원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상의 일"을 의미했다. 하지만 점차로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로 축소 됐고, 이 축소는 '대오류'를 위한 또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예배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예배"와 "행위"의 이분법을 막고 하나의 실재적 삶(영과 육이 별개가 아님)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늘날의 예배는 마치 "일주일간의 에너지를 공급해주기 위해 고안된 행위"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예배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인 것이다. "최후심판"에서 예수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곧 하나님 예배의 한 방식이라고 말한다(마 25:31-46). 또한 형제와 화해 없이는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한다고도 얘기한다(마 5:23-25).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바 된 사람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예배의 의미이며, 대오류가 설 틈도 없는 설명이다. 많은 교회들이 현대적 의미의 예배로 전향하려 하지만 새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더 나은 것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내 이웃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를 조사하고 검토해주고 그들을 대변해 주는 관심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명령이요, 위임인 것이다. 그것이 예배인 것이다.
예배의 또다른 형태인 성례전(성찬식)은 "해방"과 거리가 먼 것으로, 사람들이 빵조각을 먹고 포도주를 잠시 입에 대는 "영성" 그 차체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 식탁에서 먹고 마시면서 가난한 백성들의 실제적 식탁의 먹고 마실 것을 확인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화가 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성례전을 지루한 일상에서 맞는 특별한 행사로 여기고, 행사를 마친 다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에 있어 성찬식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모든 식사의 모범이었다. 즉, 성례전적 의미는 모든 일상에서 배풀어져야할 나눔인 것이다.
제7장 연구사례 : 영성과 성
기독교는 성(性)을 매우 죄악시 하고 있다. 반면 히브리성서는 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지 않았다. 『아가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사랑의 시다. 또한 창조이야기에서 편집자는 하나님이 남녀의 창조 후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한다. 이처럼 본래 '성(性)=죄'라는 후기의 등식은 히브리성서로부터 기독교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헬라문화의 이원론적 영향에서 근거한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유산에 일조를 하였다. 성은 오직 결혼에만 속할 것 성은 오직 자녀를 가질 목적에만 한 할 것 성은 배우자가 아무런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한에 과 의 조건 안에만 할 것. 이처럼 성을 천하게 여기는 인식은 여성을 천하게 여기는 인식을 동반했다. 그러면서 여성을 교회의 지도자 역할로부터 배제시켰다.
그러나 영성과 성은 서로 반대 되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 긴밀하다. 『아가서』의 사랑을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알레고리화 한 것은 감수성이 강한 독자들의 시야에서 성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최상의 이미지는 "사랑"인 것이다. 실제로 『호세아서』는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사랑이 너무도 유사해서 마치 대체가 가능할 정도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인간의 사랑에 관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도우며,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약혼녀 레기나와의 결혼을 파기했다고 그의 저서에서 밝힌다. 마틴 부버는 이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별개의 것으로 나누는 시도에 대해 키에르케고르의 결정에 비판을 가한다. "다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갖는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레기나들'을 포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126)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에는 궁극적인 분리가 있을 수 없다.
제3부 근본적인 재건
제8장 계획C : 재정의(再定議)의 실천
수세기 동안 성자는 시장이 아니라, 사막이나, 수도원 같이 세상과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참된 성자란 이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을 가슴에 품으면서 그 모호성과 권력투쟁 그리고 시련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 성자들은 영성과 해방의 불가분리성을 나타내려고 한 시도로 인해 죽음을 맛보았다. 이들의 죽음은 로메로 주교의 "만약, 내가 죽으면 살바도르 민중들 속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란 말대로 민중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영성과 해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습격과 공격을 받으며 표시도 없는 무덤에 내던져졌다.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정의를 행하는 것(예 22:12-17)이라는 성서적 진리를 체현하는 수천의 이름 없는 성자들이 되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세군도 갈릴리아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동시적 헌신"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이웃과의 만남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조용한 평온함이 영성의 품질보증은 아닌 것처럼. 영성의 삶이란 안전한 무관심의 항구가 아니라 이 세상 고통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한다. 또한 이는 상호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죤 그루치는 "경건의 사유화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을 파괴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해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의미를 가진다. 민중을 파괴시키는 불의한 사회구조로부터의 해방 운명의 힘으로부터의 해방 개인적인 죄와 죄책으로부터의 해방. 이 세차원의 진술은 "단지" 정치적이거나 "단지" 성서적이거나 또는 "단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합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미가의 권고와도 유사함을 갖는다.
제9장 계획C : 약간의 결과들
우르과이 예수회 신부인 세군도에게 있어서 해방의 영성을 위한 출발점은 단순하다. 즉, 세계는 지금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의 세계에 만족할 수 없고, 도덕적 편안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사야서』58:1-12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백성의 가증스러운 예배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예언자에게 지시를 내려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알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죄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여기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정의를 확립하라는 충고는 지방회당의 행동강령이 아니라 예배에 관한 정의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빵을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질서를 창조하여 누구든지 빵값을 지불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정의를 위해 행동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예배의 의미를 밝힌다는 것을 나타낸다.
영성과 해방을 이해함에 있어 이제 우리는 옛 용어에 대한 새로운 진술을 들을 필요가 있다. 유럽신학자 요하네스 메츠는 바울은 세상과 연대를 비판 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순응주의를 비판한 것이라고 보고, 바울의 금욕주의는 그것이 "미래를 위해 현재에 저항할 때는 혁명적인 것"이 된다고 했다. 또한 기독교 신비주의는 비밀스런 자기도취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신비주의라고 얘기했다.
"도적질하지 말라"와 같은 전통적 지혜도 새로운 해석이 요구된다. "너는 나에게서 아무것도 훔쳐선 안 된다"는 것을 보증했지만, 수세기 동안 포장 되 온 이 계명 속에는 복잡한 사실이 숨겨져 있다. 초대교부 시대 때의 기록에 이미 "필요 이상의 것을 더 가지는 것은 도둑질"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2300명 주교들이 "극도의 빈곤은 부유한 사람에게서 필요한 것을 취할 권리를 갖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몇 사람의 부자와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는 도적질이 지배하는 사회이며, 이러한 사회에서 혜택을 보는 자들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이다."(160)
제10장 언어로써 나타낼 수 없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냄
헨리 나우웬은 "기도한다는 것과 가난한 자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서로 함께 결합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억압과 착취에 직면할수록 기도에 대한 요청은 더욱 증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 헨리 나우웬의 새로운 참여는 그의 기도생활의 한 표현이지, 결코 어느 한 편의 선택이 아니었다.
정치적 피난민을 돕다 법정에 선 페기 허치슨은 예수의 가르침(마 25:31-46)은 지금 자신이 처한 바로 그 상황을 위해 씌어진 것이라며, 정치적 난민들을 못 본 체해서는 안 된다고 요약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 "정치적 활동"과 "신앙"은 둘이 아닌 하나였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순교의 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는 어느 정도 미국의 책임이 크다. 왜냐하면 미국이 제공한 군수품과 무기와 살인훈련으로 무장된 사람들에 의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습격이 있은 뒤, 장례식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참석자들은 "프레센테!"(나 여기 있습니다!)를 외친다. "라파엘, 지로에 의해 죽음… 프레센테! / 마리아, 탁아소에서 기관총에 의해 살해됨… 프레센테! / 후안, 병원을 사수하다 살해됨… 프레센테! / 호세, 저격범에 의해 살해됨… 프레센테!" 결국 "여기 있습니다"란 표현은 그들이 지금 우리 속에 살아있다라는 표현인 것이다. 그들은 기도한다. "주여, 저들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 속에서 계속 살아있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 속에 우리 또한 저들 속에, 살아있게 하소서" 이것은 정치적 행위인가, 아니면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인가?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도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 처럼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실제적 요구에 응하며 우리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1996년 2학기 존경하던 선배, 이호 목사님으로 받아 오랫동안 간직해온 책이었다. 비록 10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지만, 나는 해방신학의 존재적 의의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남미에는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인해 많은 부분 부의 양극화가 현실화되면서 빵에 대한 나눔이 실재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세계화"가 부각되었더랬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도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중산층의 비중이 낮아지고, 비정규직 문제가 뉴스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명박 정권 전까지는 그나마 뉴스나 여러 매체 심지어는 국가도 많은 부분 이들에 대한 알권리를 보장했었지만, 이제는 그도 넉넉치 않은 것 같다. 바야흐로 우리는 남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하는 시점에 살고 있다고 봐야하겠다.
'READING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리뷰] 신의 나라 인간나라 (0) | 2009.06.26 |
---|---|
[북리뷰] 신화의 이미지 (0) | 2009.06.23 |
[북리뷰] 그리스도의 탄생 (0) | 2009.06.15 |
[북리뷰] 예수 새로보기 (0) | 2009.06.14 |
[북리뷰] 성서의 갈등구조 (0) | 2009.06.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