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인물과 사상 16권은 종교를 다룬다. 저자 강준만 교수의 말대로 이 책은 시작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도 이 주제를 다루면서 만족스럽지 못했음을 내비치니 말이다. 하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류의 글에도 많은 정보를 얻고, 정신의 경계를 세우고, 비판적 지식으로 채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다음의 내용들은 이 책의 일부분일 뿐이나, 내 손가락 채에 걸려 아래에 담아둘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1) 대형 사찰의 주지가 사금융업에 전주로 등장했다는 작은 인용문(20). 언젠가 사금융을 잠깐 비껴 다룬 책을 보면서 사금융에 대한 지식을 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책은 절판되어 볼 수 없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경찰들조차도 파악하기 힘들다는 그 전주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형 사찰의 주지도 전주가 될 수 있다는 작은 단서는 흥미로움을 떠나 충격이다. 비단 주지들만 그러겠는가? 넘쳐나는 돈을 주최할 수 없어 장로와 목사들도 그러고 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은가!
2) “오늘날 성공한 교회, 즉 대형 교회는 대체로 신자들의 기복적 욕구를 잘 파악하여 그들의 ‘주문’에 맞는 ‘기복 상품’을 제공한 교회이다. ‘기복 장사’를 하는 교회는 교인의 숫자에 의하여 그 ‘효능’을 검증받기 때문에 무제한적 성장을 추구한다. 여기서 기복신앙과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가 손을 잡는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기복신앙이라는 내용과 자본주의적 성장 논리라는 형식을 결합시킨 종교권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신교 종교권력은 이미 거대한 규모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주의’를 기본 에토스로 한다. 여기에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가세되어 오늘날 한국 개신교 종교권력의 기본 속성이 결정되었다.” (이진구. ‘개신교와 성장주의 이데올로기’, <당대비평>. 2000년 가을호 239쪽.) 명쾌한 교회 해설이다. 예수를 죽인 종교권력이 오늘날에도 계속 살아 역사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승리주의는 다분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인데 한결 같은 특징을 갖는다.
3) “구약의 율법은 소득의 10분의 1을 의무적으로 바치도록 요구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모두 10분의 1만 바치면 충분했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 아래서는 각자 마음의 정도와 능력에 따라 자원하여 바치도록 하고 있다. 그래야 헌금의 정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박하규.<한국교회 어떻게 살리 것인가 :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100 ~103쪽) 헌금의 정신이라… 박하규는 여기서 헌금의 정신이라고 했지, 십일조 보다 더 적게 내라는 말을 한 건 아니다. 어쩌면, 맘몬을 내 마음 속의 주인으로 삼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더 많이 내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면에서는 이웃을 돕는 어떤 행위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것은 구제의 헌금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많은 개연성을 갖게 된다. 헌금의 정신은 틀에 박힌 십일조에서 다양한 의미의 구제와 신에 대한 헌신으로 의미의 확장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저자가 얘기하는 초점은 십일조에 대한 교회의 강요에는 더 이상 당위성이 없다는 것인 거 같다.
4) 손봉호 교수는 진정한 보수다. 강준만은 말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거의 다 가짜다. 극우 파시스트들, 그리고 불법·탈법·파렴치 작태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자들까지 자기들이 보수주의자라고 설쳐대는 바람에 ‘보수주의’라는 단어가 욕보고 있는 것이다.”(73) 이어서 그는 손봉호 교수야 말로 진정한 보수라고 강조한다. 손봉호 교수는 자신을 선지자적 비관주의자라고 했다. 구약의 예레미야,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모두 비관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도덕 불감증을 치유하기 위해 ‘합리적 이기주의’를 주장했다. 기독교윤리실천 위원회를 만들고, 성역 없는 교회 비판에 한 몸을 투신 분이시다. 그러나 강준만은 그의 합리적 이기주의가 과연 좌파 알레르기를 극복한 것인지 되묻고 있다. 알레르기는 도저히 합리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이란다. 그는 전교조나 전대협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글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덕성의 잣대로 문화예술을 재단하려 했던 시도들에 대해서도 꼬집고 있다. 김규항은 그것을 문화적 파시즘이라 규정했다. 맺는 말에서 강준만은 손봉호 교수에게 그 높은 도덕성으로 ‘촌지’문제 보다 더 큰 썩은 신문에 대한 도덕성 문제에 나서주기를 주문하고 있다.
5) 강원룡 목사는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 이해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라고 한다. 그의 풍부한 인맥은 역사의 현장마다 그를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강목사는 젊은 날 라인홀트 니버의 사상인 ‘기독교 현실주의’에 심취하여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세우고 ‘대화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니버에 감명받은 사람 중 손봉호 교수도 있지만, 둘은 성향이 많이 다른 것 같다. 어쩌면 강목사는 권력에 더 가까웠다. 강목사는 6·25를 거치면서 동족과 인간성에 대한 절망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의 ‘반공’은 몸으로부터 학습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권력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기회가 많았던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박정희를 끊임없이 좌파로 의심했다고 한다. 그는 교회들을 대표하여 해외로 많이 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외줄타기 외교술은 많은 진보와 보수 성향의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오해가 되어 곤혹스러움이 많았다고 한다.
6) 진중권이 디오니게네스가 얘기한 “우연에 용기를…”란 말에 해설을 달았다. 지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발언을 해야 할 때, 그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설 해야 하는 상황에서 위의 고백이 나온다는 것이다.
7) 강준만은 법정을 까다롭고 괴팍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본다. 그의 글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먼 데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 법정 자신의 이야기를 두고 한 것이라 짐작한다. 법정은 ‘무소유’를 주장했지만, 강준만은 법정이 글쓰기에 대한 욕구에 있어서 만큼은 떨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이 특별이 욕 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아 내심 강준만의 생떼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법정은 원래 사회참여적 지식인 이었으나, 인혁당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산에 은둔했다고 한다. 어떤 ‘운동’보다도 ‘개인의 인격 형성의 길’이 더 중요하다는 깨우침을 얻은 것이란다. 그래서인지 꾸준히 스테디 셀러가 되는 그의 책은 교도소 교화용으로 그만이고, 일종의 ‘위로와 평안’의 힐링 상품으로도 그만이라고 비꼰다.
'READING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리뷰] 인도신화의 계보 - 류경희 (0) | 2012.01.17 |
---|---|
[북리뷰]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살림지식총서004) (0) | 2009.08.12 |
[북리뷰] 예수의 무덤 (0) | 2009.06.27 |
[북리뷰] 신의 나라 인간나라 (0) | 2009.06.26 |
[북리뷰] 신화의 이미지 (0) | 2009.06.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