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예수를 묵상하며, 얻을 수 있는 기쁨과 감격이 어떠한 것인지 맛보게 해 준 책이었다. 그 동안 예수에 관한 책을 많이 탐독해 왔다. 예수가 존경해마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고, 워낙 베일에 쌓인 인물이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신학서적은 서로 동류의 연구물만 인용하니, 깨달음이나 감동보다는 새로운 지식만 더 해 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유주의 신학류의 책은 예수의 신성을 없이 했고, 해방 신학류의 서적은 너무 버거운 실천만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정치나 경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또는 진보적 시각을 취하면서 갖게 된 생각들로 머리가 굳어지고, 마음이 강퍅해졌을 때, 다음의 구절들로 새로운 도전을 받았다. “정치운동이란 속성상 선을 긋고 구분하고 판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은 그 선을 지우고 구분을 초월하며 판단 대신 은혜를 베푼다. 낙태 반대운동을 하는 우익이든 평화와 정의라는 가치에 중점을 두는 좌익이든 나름대로 내건 이슈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치운동인 이상 거기에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생체를 질식시킬 권력의 덮개가 도사리고 있다. 내 자신이 무슨 대의명분을 지지하든 사랑과 겸손의 덕목을 배제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하나님 나라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예수로부터 배운 바다.” (333)
예수가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 받는 장면이 묘사되는 부분에 대한 저자의 질문과 답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탄의 요구에 과연 악한 요소가 있는가? 이 세 가지 유혹 내용은 예수에게는 당연한 특권, 메시아에게는 반드시 기대되는 마땅한 자질인 듯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고 그보다 더한 이적도 베풀 것이 예정된 사실 아니던가? 또 죽음을 이기고 만왕의 왕이 되기 위해 부활할 것 아니던가? 이 세 가지 유혹 그 자체에는 악한 요소가 없는 듯 하다. 그럼에도 광야에서 뭔가 분명코 중요한 일이 벌어졌음은 어찜일까?” (90) “이따금씩 나는 하나님께서 좀더 강하게 접촉해 주시기를 바란다. 불신앙의 자유와 유혹이 너무도 많이 허용되고 있어서 내 믿음은 오히려 고통 받는다. 때때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제압해 주시기를, 그분의 존재와 사랑에 대한 흔들림 없는 증거를 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99) 이처럼 나 또한 사단이 요구했던 것과 같이 믿음에 이르게 하는 기적과 증거를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 가 싶다.
이에 대한 답으로, 저자는 조지 맥도날드의 글을 인용한다. “신적인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멸하는 대신, 사악한 자들을 물리치고 강제적으로 정의를 펼치는 대신, 완전무결한 왕으로 통치함으로써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대신,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원하거나 말거나 그들을 무조건 자신의 날개 아래 모으고는, 자신의 예언자적 기백을 흔들리게 했던 공포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는 대신, 그는 악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 제 할 일을 하게 했다. 그는 별로 극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천천히 필요한 만큼만 도와주는 것에 만족했다.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한다든가, 사탄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쫓아내기만 하는 … 의를 사랑한다 함은 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더 자라게 함이다 … 그는 일을 속전속결로 해치움으로써 저급한 선이나마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충동에 저항했다.“(100) 그리고 여기서 한 반 더 나아간 저자의 깨달음을 들어보자.
“인간의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된 태도는 절대적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갈 자유를 주었고, 그분에게 침 뱉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까지 허용했다. 광야의 유혹자와 대결할 때 예수는 이미 이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 광야에서 예수는 억제력이라고 하는 것 하나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억제력을 한사코 고집하는 이유는 당신의 전능을 아무리 화려하게 전시해 봤자 정작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권력은 복종을 강요할 수 있지만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며, 그 사랑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것이고, 우리를 창조하신 유일한 이유이다.” (101) 그분을 향해 침 뱉을 권리까지 주신 그분은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원하셨기 때문에, 강제적인 방법으로 휘어잡으려 하시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사랑에는 그 자체의 힘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있다.” (102)고.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헨리 나웬은 명망높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뒤로한 채 아담이라는 한 지체장애우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참인간이 되는 길은 우리 정신이 아니라 가슴이며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고 했다. 또한 아담의 단순한 성격을 보노라면 사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려면 ‘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함과 비움은 사막의 수도자들이 오랫동안 찾고 또 훈련해서 간신히 성취하는 덕목이 아니던가.”(162) 이처럼 헨리 나웬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수도자의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이리라 생각한다.
예수는 결국 온몸을 던져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이루고야 만다. “내가 놀라다 못해 의문스럽기까지 한 것 중 하나가 역사에서 징기스칸이나 히틀러, 스탈린 같은 사람들이 등장할 때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셨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 옛날 예루살렘에서 암흑의 금요일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던 데는 미치지 못한다. 따귀가 한 대씩 날아올 때마다, 주먹이 몸에 닿아 섬유질의 느낌으로 우직끈거릴 때마다 예수의 마음속에서는 광야와 겟세마네에서 받은 유혹이 불끈불끈 되살아났으니라. 천사들의 군단이 명령 하나로 언제고 들이닥칠 수 있다. 한마디면 그 모든 시련이 멈추는 것이다.” (273)
하나님은 자신을 향한 사랑을 힘으로 강요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연약함을 통해서라는 자각이었던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해 사랑 때문에 힘을 포기하실 수도 있는 분으로 재정의하게 했다. 도로티 죌레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는 ‘하나님 편의 일방적인 무장해제’가 된 것이다. 힘이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고통을 낳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은 스스로 약해짐으로써 그 고통을 자기가 흡수해 버린다.” (280)
십자가에 대한 세상의 시선에는 예수의 양 옆에 섰던 두 강도로 예를 들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의미로 그 두 강도는 인간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놓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의 무력함을 무능한 하나님의 예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산 예로 볼 것인가? 주피터와 같이 강한 신을 섬기던 로마인들은 나무에 매달려 비비 꼬인 자세로 죽은 시체에서 신성을 알아볼 재간이 없었다. 여호와의 힘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교육 받은 경건한 유대인들 또한 이 무력하고 수치스럽게 죽은 신에게서 떠받들 만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순교자 저스틴이 유대인 트리폰과 나눈 대화에서도 유대인들로서는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그를 메시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한테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79)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제자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예수는 ‘너희가 법률을 통과시키고 부도덕을 추방하고 가족과 정부에 대한 가치를 회복시킨다면 …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죽기 전날 밤, 그러니까 로마와 유대 종교 당국의 힘으로 대표되는 인간 권력이 하나님의 권력과 정면으로 충돌하던 그날 밤에 했다. 그는 일생을 바쳐 경직된 기성종교와 이방제국을 상대로 일종의 ‘문화전쟁’을 치렀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그들에게 마침내는 생명을 던짐으로써 응답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용서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336)
예수를 새롭게 묵상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제자라면 마땅히 서로 사랑함을 실천해야 함을 말이다. “지저분한 거지들을 위해 그렇게 헌신하는 까닭이 뭐냐는 질문에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대답을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에 대한 묵상을 먼저 하지요. 그런 다음엔 나가서 그분이 어떻게 변장을 하고 계신지 찾는답니다.’” (315)
“우리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찾아야 할 곳에서 찾지 않은 탓이다.” (314)
성스러운 주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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