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독특한 시집을 골랐다. 시로부터 함축적인 언어의 향미를 느끼고 싶어 들었는데, 역시나 잘 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빵 터진 시도 있었다. 다음을 보자.
숙박계의 현대시사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모르는 / 현대시사가 있었다 /
여관에서, 아니 여인숙에서 / 하룻밤 자는 데도 /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야 했던 /
궁색한 실록의 시절 / 뒤통수치던 출석부를 닮았던 / 검은 표지의 명부에 /
그 해 여름 몇 줄씩 사초를 필사했다 / 시선을 둘 데 없어 /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등지고 /
신경림, 최승자를 적고 / 욕실 속 샤워하는 그림자를 짐작하며 / 정현종, 김승희를 갈기고 /
내 어꺠를 잡고 낄낄대는 여자의 교정을 받아 / 황지우, 김혜순을 기입하기도 했는데 /
막상 숙박계를 펼치면 시보다 / 더 어려운 이름들에 커플은 늘 바뀌었지만 /
시들만은 제 이름을 / 버리지 못하고 계절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
이성복, 김남주를 쓰고 보니 / 너무 심하다 싶어 고친 저녁도 있었다 /
김지하를 쓰지 못한 소심한 오후도 빠트려선 안 되리라 /
이 느닷없는 호출에도 / 그즈음 현대시사는 평온하기만 했고 /
검은 책 앞에서 고민하던 사가도 잊혀갔지만 / 화양리에서 엮는 변두리 시사에는 /
계몽과 실험이 / 몸을 섞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 늘 여자 반, 남자 반으로 이루어진 /
금기도 없고 계통도 / 묻지않는 뜨거운 불륜도 거기 있었다 /
거기, 화양리에는 / 여관 아줌마만 / 건성으로 읽던 현대시사가 있었다
젊은 시절, 여인숙을 드나들던 추억으로부터, 저들의 숙박계엔 시인들의 이름이 가득했었노라는 일화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런 풍경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차마 김지하에 이르러서는 쓰지못했다는 경외감도 소회한다. 한편 시인으로써 시를 쓰는 (시작법)에 대한 기도의 시도 흥미로웠다.
시작법을 위한 기도
저희에게/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 발성법을 주옵시며 /
나날이 낯선 /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 세상에 서게 하소서 /
의도대로 시가 /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 상상력의 홀씨가 /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
회고는 /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 사물에서 과거를 /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
밤벌레처럼 유년을 /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
거짓 희망으로 /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 삶이란 글자 속에 /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
영원토록 /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정말 <평화의 기도>처럼 절절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왜이렇게 웃긴지...
나도 프로그랭을 위한 시를 지어야 하나?
시인의 자존심을 읇은 부분도 기억에 남았다.
각주
제 시에 각주를 다는 시인보다 / 측은한 이도 없으니 / 떨쳐버릴 수 없는 저 소심이여 /
세상이 다 알고 저만 모르는 것을 굳이 드러내는 한심이여 / 몸 가벼운 너는 웃어주마 /
제 발 저린다고 / 지레 손사래 치는 상심이여 / 그런대로 너도 웃어주련다 /
외진 서가에서 구해온 / 자산을 자랑스레 던져주는 선심이여 / 어찌 너도 잊지 않을 수 있으랴 /
크레졸 냄새 가득한 결벽증으로 / 문약한 시인들을 / 몰아가는 제국의 이신전심이여 /
너는 웃지도 잊을 수도 없구나 / 행간들 위에 드리운 / 무거운 기압에 /
찔끔찔끔 흐러나오는 요실금의 각주들이여
시에 대해 크레졸 냄새나는 편집장들이 각주달라고 압력을 넣나? 아무튼 저들의 자존심이 어디에 가 닿았는지 적나라함의 일부도 느낄 수 있었다.
<헌책방에서 이승훈 시집을 읽다>는 시에서는 "나는 시를 쓰기 위해 내 앞에 / 옛날 애인을 초대하기로 한다"는 문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아마도 설레임이 시작을 위한 동기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인가보다.
시인의 소망 대로 나또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나 스스로를 단련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른한 토요일, 좋은 시집과 함께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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