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본 영화>는 여성학자 정희진이 보고느낀 영화 비평서이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바라본 감수성이란 게, 도데체 남성으로서는 알길이 없고,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내공이다. 나도 때론 그만큼 민감하게 영화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영화가 내게 말을 잘 걸어주지 않는다. "너는 남자라서 모른다"고. 그것은 정희진의 말마따나 남성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있기때문이랄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영화 중 일부는 아예 그 어디에서도 구해서 보기가 힘든 독립영화, 여성주의 영화, 난민영화가 있다. 대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개봉한 지도 10년이상이 지난 것들이다. 개중에는 나도 <가족의 탄생>이나 <릴리 슈슈의 모든 것>등을 찾아 보게 되었다. 앞으로도 여기에 소개된 영화를 천천히 보며 공감하게 되지 않을지 기대해 본다.
다음은 이 책에서 밑줄친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다.
성매매 상황에서 벌어지는 남성 손님의 구타, 강간, 살인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여성 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부딪히는 여론은 "그 여자들은 어차피 그런 걸 각오한 사람들 아니냐."라는 것이다. 여성의 섹스가 매춘이든 사랑이든,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선택일 때, 여성은 목숨을 잃는 것을 포함해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실제로 몇몇 생각없이 내뱉을 수 있는 말들이지만, 이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의미인지, 사회 구조적으로 내밀려진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무지성 언어인지를 깨우쳐주는 말이다.
스릴러 영화의 공식인,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하는 팜파탈(femme fatale), 즉 치명적 요부는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 존재이기에 오랫동안 남자 감독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이는 남성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이 젠더에 의해 제한받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팜프파탈에게는 남성을 무너트리는 폭력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남성성을 부여한 결과이기에 가능한 남성 문법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 새삼 놀라웠다. 남성 몰락의 근원이 남성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여자에게 어떠한 추방과 사회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나혜석처럼 살고 싶지만 나혜석처럼 죽고 싶은 여자는 없는 것이다.
나혜석의 말로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예술가의 외로운 말로였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서 펼쳐지는 일상적 폭력이었다.
사람들이 왜 결혼하겠는가?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이 끝나서 자발적으로는 그 감정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제도의 힘을 빌리는 거다. 세상에 결혼/가족 제도 보다 강한 제도는 없으며 그 제도를 돌파하는 사람도 드물다.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다. 좀 찔렸다. 사랑의 종말에서 결혼을 찾았던 걸까? 그럴수도. 제도를 빌려 안정감을 추구한 것이란 말이 더 솔직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색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정희진의 크기만큼 영화가 보여지지 않는 것이겠다. 내 삶의 협소한 지경만큼만 보일 뿐이다. 그 시선의 높이가 부럽다.
내가 늘 주장하는 대로 '착한 여자'와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반대말이다.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착한 여자지 나쁜 여자가 아니다. 불평등과 착취는 부정의하다. 착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은 이에 반대한다. 저항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우리'를 나쁜 여자들이라고 한다면 사회가 잘못이지, 우리가 굳이 나쁜 여자라고 되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정희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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