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이 문학도들에게 전범이 되는 글을 소개하고자 마련했다는 세계문학산책 1권은, 사랑에 관한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나 같은 일반인도 흥미로운 인생들을 엿보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르네 / F. R. 샤토브리앙 - 초월로 가는 길목으로서의 사랑
이 소설은 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글 전반에 흐르는 과잉 감정 표현은 글을 뽐내기 위해 쓰여진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요즘 세대에는 좀 맞지 않는 낡은 사랑 이야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문열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어려울 만큼 육체와 성은 철저하게 배제" 되었다고 밝힌다. 종반까지 대반전을 기대하며 읽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허무주의에 쌓인 주인공, 르네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엿볼 수 있었다. 어떤 일에든 쉽게 흥미를 져버리고, 열정이 식어버리는 르네. 어쩌면 누이에 대한 사랑이라는 잘못된 설정이 부른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귀여운 여인 / 안톤 체홉 - 세상을 이해하는 눈 혹은 삶의 방식
체홉의 단편 <외투>를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화려한 문체로 승부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단조롭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독자의 기억 속에 각인 시키는 힘을 가진 작가라는 인상을 준다. 그가 묘사한 주인공 올렌까라고 하는 여인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에 대해 이문열은 이렇게 변호한다. "사랑은 어떤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는 삶의 기본조건이며 방식이 된다.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체홉이 <귀여운 여인>에서 그려내고 있는 올렌까는 바로 그 전형이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향해 옮겨간다.
에밀리를 위한 장미 / 윌리엄 포크너 - 세월과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전율스러움
사랑하는 연인을 죽이고 30년을 간직한 채 살다간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미저리를 떠오르게 한다. 이에 이문열은 이렇게 얘기한다. "호머 배론을 독살한 뒤 홀로 늙어간 긴 세월의 처절한 외로움과 이웃의 천박한 호기심과 변하는 세태에 꿋꿋이 맞서 가는 그녀에게서 나는 스산하면서도 장엄한 노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간직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의 끝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환상을 쫓는 여인 / 토마스 하디 - 외날개의 새
시인 지망생인 세 자녀의 엄마 엘라가 어느 날 유명한 시인의 집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갖게 된 시인에 대한 동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한번도 그 시인을 만나보지 않았지만, 무관심한 남편보다야 마음의 그를 더 가깝게 여겼는가 보다. 시인은 고독감에 못 이겨 자살하고, 그것이 자신의 탓으로 돌리던 엘라도 뒤따라 삶의 의미를 놓는다. 무엇이 그녀를 그 환상에서 못벗어나도록 옭아맸는지 안타깝게 되돌아 보는 이야기였다.
달로 가는 도중에 / 바실리 아크쇼노프 - 싱싱하게 형상화된 사랑의 양면성
재미있는 이야기다. 잔잔하면서 다양한 공상과 설레임이 가미되면 누구에게나 떠오를 수 있는 문구처럼, 그래서 더더욱 내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그런 공상적인 부분에서 말이다.
별 / 알퐁스 도데 - 멀고 잡을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
어린 시절 사랑의 대상은 순결한 그 무엇에 대한 경이감이 함께 동작했던 것 같다. 목동이 스테파니 아가씨에 대해 품었던 그런 감정처럼. 이문열은 이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정은 대상이 추상화될수록 오히려 치열해지고, 맑고 깨끗함이 아름다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내게 별처럼 멀고 잡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그토록 맑고 깨끗하게 그려낸 소설은 감동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의 가슴 떨리던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 아르투로 슈니츨러 - 치정, 혹은 흉기 같은 사랑
라이젠보그 남작은 그녀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했는데, 그녀는 늘 다른 남자들에게만 시선을 돌렸다. 사랑을 이용하는 능수능란한 그녀의 밀고 당기기에 바보같이 이용만 당하는 라이젠보그 남작을 보면서 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랑은 그의 삶에 치명적인 흉기가 되어 죽음에 이르게한다. 그래서 이문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실은 대공의 저주가 그를 죽인 게 아니라 처 참하게 드러난 사랑의 실상이 그를 죽였다." 조금이라도 같은 경험을 한 이들에게는 큰 공감을 일으키는 어긋난 사랑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바니나 바니니 / 스탕달 - 다른 가치와의 충돌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가정의 딸로 귀하게 자란 숙녀가 어느 이탈리아의 혁명당에 가입한 청년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청년은 늘 왕정을 혁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선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두 번째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사랑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고 보니, 옛사랑의 기억과 감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그래도 대부분의 감정은 설레임이라고 보아야겠지. 지금 있는 사람에게서 많이 사라진 그 설레임을 다시 발견해야겠다는 뒤늦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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