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두 읽었다. 프로젝트 뛰느라 거래처 출퇴근하면서 적적한 차에 큰 위로와 재미가 되는 책이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이 1928년에 세상에 내어놓은 대작, <임꺽정>은 가히 당시 어디에도 견줄수 없는 대하소설이라 할 작품이었다. 각 인물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하며, 가락에 어울려 노니는듯한 옛 어구들은 "춤추는 글"이라 할 만큼 읽는 재미를 더해줬다. 10권을 모두 소화해 내는 동안 먼저 먹은 것 똥 되는 냥으로 기억이 가물하지마는 전반적으로 느낀 소회를 적어,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 몇자 놓는다.
(1) 조선의 암울한 역사를 그리다.
우선 <임꺽정>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작가의 풍부한 상상이 더해진 '픽션'이지만, 그 속엔 암울한 조선 서민의 눈물겨운 역사가 엿보였다. 나무 둥치를 들어 뽑는 천하장사 임꺽정과, 새의 눈을 맞추는 명궁 이봉학, 표창을 귀신처럼 쓰는 박유복, 돌을 기가막히게 던지는 배돌석이 등의 인물들은 왠지 수호전의 인물이듯 하나같이 기이하다. 그런 인물들의 활약을 거두어 놓고 보면, 길가던 백정이 양민을 치어다 본다고 매 맞는 것은 매양 어색한 것도 아니요, 타당한 노동의 대가를 바라고 갔다가 유지에게 매맞고 나오는 것도 당시에는 죽지 아니하면 다행인 억눌린 밑바닥 인생들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시대가 상하 구별이 각별했고, 도타웠다.
꼭두각시 왕 명종과 그 어미 되는 문정왕후의 수렴첨정, 그리고 그 남동생 윤원형의 착복과 뇌물 수수는 온 나라 안의 매관매직을 암암리에 부추겼고, 각 고을마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저마다 서울의 자리 하나 차지하려니, 서울의 영중추부사 윤원형의 집 대문은 늘 지방에서 올라온 뇌물로 줄을 이었다. 그뿐인가 대인을 논하는 양반들이 배신과 모함을 일삼으니, 백성들의 본이 될 수 없었다.
연산군 때로부터 명종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각종 사화는 조광조를 위시한 당대 명망있는 위인들을 몰살하고, 윤원형을 포함한 간신들이 득세하고 나와 조정을 어지럽히니, 나라의 꼴이 어떠했겠는가?
반상의 철저한 계급적 분리. 가난에 이끌리어 스스로 누군가의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백정의 자식으로 천대받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 부패한 권력에 휘둘리어 어제의 재상이 오늘의 귀향살이를 할 수 있는 그런 사회. 현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옛 선조들의 눈물겨운 삶과 고락이 펼쳐지고 있었다.
(2) 임꺽정이는 의적인가?
그러한 조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관원을 농락하고, 감옥을 깨부수며, 서울로 향하는 뇌물을 가로채는 임꺽정의 이야기는 서민들에게 고래로 많은 위로가 되어왔을 것이다. 이야기를 보면, 그들은 저마다 태어날 때부터 도적은 아니었지만, 처지와 사정이 도적으로 내어 몰리게끔 조선은 그 상황을 낳았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저자는 임꺽정 보다 더 큰 도적인 조정대신들을 비판하고 있으니, 임꺽정의 등장이 왠만큼 정당화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은 의적이라 불리울 수 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필자가 <임꺽정>을 읽기 전의 이미지는 분명 "의적"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실상 벽초 선생의 <임꺽정>을 대하고 난 다음에는 그런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우선, 임꺽정의 도적질은 그들의 안위를 위한 것일 뿐,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명분은 전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런 생각이 떠오르던 대목을 들자면, 청석골을 빠져나온 임꺽정 일행이 광주산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도륙내고, 차지하던 때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몰리고 몰려 산 위에 화전마을을 이루고 살 때, 난데없이 나타난 임꺽정 일행이 저들을 몰아낼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은 후반 독서의 재미를 떨어뜨렸다.
여색에 취하여 정실마누라를 다섯이나 끌어 안고, 도적의 우두머리가 된 이후로는 더없이 안하무인이 되어버리는 모습은 권력의 단맛에 취한 임꺽정의 어리석은 면모를 보여준다. 당대의 이인(양주팔/갓바치/병해대사)을 스승으로 두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건만, 그의 삶을 통해 발휘되지 못했던 것은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들게 하는 이유였던 것 같다. 소설 막바지에 이르러 나오게 되는 어떤 양반의 일침처럼,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의적이 될 수는 없었는지’ 묻고 싶다.
(3) 부당한 사회에 대한 폭력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인생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독한 반감이 서리게 된다. 그래서 묻지마 범죄도 늘게 되고, 때로는 생계형 범죄도 불러일으키게 한다. 양극화가 더욱 심해 질수록 이러한 사회 범죄, 병리현상은 다양화되고 보편화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점을 본 소설을 통해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임꺽정의 화적패는 한 마디로 현대의 조폭을 방불케 한다. 자릿세를 받거나, 폭력으로 남의 삶의 자리를 빼앗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면, 관공서를 습격하는 테러 조직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겠다. 실제의 임꺽정이 소설처럼 빛나는 영웅적 면모를 갖추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당시에 국왕의 큰 근심거리가 된 만큼 역적의 반열에 오른 것을 보면, 상당한 테러조직이었으리라.
그러나 임꺽정의 화적질은 국가의 체제를 비판하고, 뒤엎는 반란행위로 이어지는 명분을 갖추지 못했다. 그저 부패한 권력에 시달리는 서민의 삶은 이중으로 괴롭히는 도적패 무리에 더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조정에 더 큰 도적의 무리가 있었다 해도 임꺽정 화적패의 도적질과 약탈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벽초 선생의 사상을 엿보는 대목이기도 한데, 사회주의자 였던 벽초선생은 해방 이후 월북하고, 60년대 북한의 부서기장으로 지낼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을 현실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반영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의 사회주의가 진정한 인민의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을 두고 보면, 결국 명분이 정당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4) 현대도 조선의 사회계급과 다르지 않다.
조선의 먼 역사는 현재의 역사와 어쩌면 다르지 않다. 우선 계급적 선이 명확한 사회라는 것도 닮았다. 잘 보이지 않지만, 재벌의 삶은 우리네 서민들로써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고귀한 피가 흐르는 듯한 변별성을 갖는다. 저들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혼인하고 거래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혈연과 학연으로 청탁이 이루어지고, 그들의 계급을 공고히 해 가는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반면, 양민들은 그저 자신의 조그만 사업을 하는 이들도 있고, 재벌에 빌붙어 피 빨리며 조금 오래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에는 종, 노비라는 신분이 있었는데, 이들과 같은 신분이 현대의 직장인이 아닐까 싶다. <임꺽정>을 읽다가 깨달은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 꼭 태어날 때부터 노비가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남의 집에 들어가 종살이 하는 경우를 본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누군가의 소작일을 봐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소작농과 같은 사람들이 현대의 직장인이 아닐까? 자기 밭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사업장에 나가 일해주고 그 노동의 댓가를 받는 것. 이것이 자발적 종살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잘리지 않으려면, 좀더 늦게까지라도 일해야 하고 위에 잘 보여야 한다. 재상가 집안의 종은 어줍잖은 양민보다 나을 수 있다. 일류기업의 직장인은 중소기업의 직장인보다 그 프라이드가 높은 이치와 맞는 것 같다.
마치며
국가와 재벌과 서민이라는 계급을 자본주의라는 잘 짜여진 체계로 옭아매어 공고히 하는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부당한 것이 너무 많고, 불합리한 것이 너무 많지만 어디 하나 호소할 데 없어, 임꺽정 같은 영웅적인 누군가가 체제에 큰 호통소리 한 번 내어줬으면 하는 바램을 내어볼 때가 있다. 어쩌면 저들 재벌가들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 모든 부정한 것을 저들의 얼굴에 갖다 던지는 행위의 일환으로 우리는 스스로의 정당함과 깨끗함을 돋우어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하여 체제를 비판하는 서적과 다큐멘터리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마음의 분노를 다스린다. 그러나 실상은 더욱 분노를 쌓아 나가고, 독기를 몸에 품는다. 이 정도의 소비하는 시간쯤은 사치도 아니다. 더 많은 사회의 부패를 자각할 때마다 더 좋은 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을 해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자식에 대한 교육 비용을 물쓰듯이 아끼지 않는다. 모순되는 나의 인생은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학교도 밟아보지 않은 아이들의 경쟁은 벌써 들끓고 있다. 우리네 인생의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대에 대한 불만을 좀더 다른 열정으로 불살르고 살 수는 없을까? 리버럴한 것 보다 좀더 쿨한 그런 면모로 살아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현실을 인식한다. 부정적인 소모성 논쟁보다는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내 몸을 가다듬고, 좀더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도전하는 것은 어떨까? 부정한 사회에서 내 몸에 흐르는 독기를 좀더 정화시켜야 할 필요를 느낀다. 정당함을 쫓다가 내 몸이 병든 것 같다. 부정적인 독기를 거두어내고, 긍정으로 내 몸을 바르게 세우는 실천이 필요하다. 더 이상 내 처지를 탓함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임꺽정>을 놓으며 느끼는 바는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나를 망치지 말자는 것이다. 비록 저들의 처지가 시대를 잘못 만나 도적패로 하나되었다지만, 일부분 그들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간접적인 카타르시스의 만족은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나의 인생을 두고 볼 때 외부의 탓만으로 내 인생을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좀더 최선을 다해 내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나에게 삶을 주신 이의 뜻이 아닌가 한다.
'READING > 소설·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리뷰] 이문열의 세계문학산책 1 (0) | 2012.02.12 |
---|---|
[북리뷰] 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고전을 숲으로 보다 (0) | 2012.02.04 |
[북리뷰] 한밤중에 행진 (0) | 2010.06.29 |
[북리뷰] 남쪽으로 튀어 (0) | 2009.06.18 |
[북리뷰] 천국의 열쇠 (0) | 2009.06.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