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문신의 흔적들
1991년 10월, 한 미이라가 냉동된 채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오짤(Otzal) 알프스 산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냥꾼은 기원전 3,300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몸에는 모두 58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고고학자들은 남부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에서 아주 잘 보존된 스키타이 족장의 미라를 발견했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남부 러시아 지역에서 활약한 유목민족이었는데 이들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 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미라도 잘 보존된 문신을 지니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문신의 흔적들이 주로 고고학적 자료들 속에 있었다면, 아메리카 대륙의 흔적들은 문화인류학적 자료들 안에 있다. 이 말은 현지에서 직접 살아 있는 문신을 본 사람들의 기록들 속에 아메리카 대륙의 문신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악명 높은 정복자 코르테즈가 1519년 멕시코 해안에 도착했을 때 처음 발견한 것은 문신을 한 사람들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자비에르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을 제메(zeme)라고 불렀고 우상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몸에 새겼다.” 역사가 디에고 로페즈는 전사들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문신을 했는데, 그래서 늙은 영웅들의 몸은 상형문자로 완전히 뒤덮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마오리족의 문신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얼굴 문신인데 품위 있게 문신을 한 얼굴은 마오리 전사들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얼굴 문신은 전투에서 그들을 용감하게 만들었고 여성들에게는 매력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유럽의 배들이 사모아에 도착했을 때도 유럽인들이 처음 발견한 것은 사모아인들의 문신한 신체였다.
일본에서 발견된 최초의 문신 흔적은 기원전 5000년쯤 된 무덤에서 발견된 진흙 소상에 남아 있고, 3세기에 기록된 「삼국지(三國志)」에도 기록되어 있다. 1888년 홋카이도 조사에 따르면, 아이누인들은 대개 어릴 때부터 문신을 시작했는데, 문신을 하지 않으면 죽은 후 조상들이 자신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문신은 인류 문화의 보편적인 현상이며 각 지역, 각 민족의 문화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찍이 윌프리드 험블리 박사가 주장한, 문신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가설은 잘못된 것이다. 문신은 한 사회 속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능이야말로 한 사회 내에서 개인을 집단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의 신입자에게 문신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문신의 기원과 사회적 기능들
문신에 관한 좀더 진전된 저작을 낸 옥스퍼드 대학의 인류학자 W. 험블리는 「문신의 역사와 그 의미」에서 문신의 동기와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통 방지, 총상 예방, 질병 치료, 초인간적인 힘의 부여, 젊음의 유지, 샤만의 초자연적인 힘의 강화, 사후 영혼 생존의 보장, 내세에서의 영혼 식별, 행운의 유인, 익사 방지, 축귀(逐鬼), 토템 동물이나 영적 지킴이의 보호나 신의 보호의 보증 등을 제시하고 있다. 기능주의적 문화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원시사회에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문신의 의미를 좀더 잘 파악할 수 있다.
문신은 주술적 기능을 갖는다. 일찍이 1884년에 아이누족의 문신을 조사한 바 있는 바첼러의 보고에 따르면 전염병이 한 마을을 습격했을 때 마을의 모든 여성들이 악귀를 쫓기 위해 문신을 했다고 한다. 치료 효과에 대한 믿음은 문신 사회의 집단적 믿음이기 때문에 주술적 기능은 사회적 기능일 수밖에 없었다.
프레이저가 그의 명저 「황금가지」에서 말한 모방주술(Imitative Magic)을 보면, 브리티시 뉴기니 서부의 여러부족 형태에서 뱀의 피해를 방지하는 습속이 있었다. 뱀에게 물리기 않기 위하여 뱀을 잡아 불에 태워 그 재를 두 다리에 바른 다음 숲에 들어간다고 한다. 타이완 고산족이 교룡(상상의 룡)의 해를 피하기 위해 용군의 형상이나 수중 괴물의 형상을 문신한 사례와 아주 유사한 것이다.
문신은 사회적 기능의 하나로 종족표지기능을 갖는다. 20세기 초 타이완의 고산족 마을에서는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후 1914년 타이완 총독부에 의해 얼굴문신금지령을 강제로 시행했다. 이는 아마도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된 단발령이나 창씨개명과도 유사한 식민지 당국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5년 후 심한 재해와 유행성 감기로 사망자가 날로 증가하자 고산족들은 이를 문신의 폐지에 대한 조상신들의 징벌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문신을 다시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신 습속을 버리는 일을 조상에게 고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나 문신의 폐지와 재난을 연관짓는 심리적 태도는 결국 조상신의 후손의 삶에 대한 관여를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조상숭배의식과 그 담론이 문신의 정당성을 보장하고 문신은 다시 집단의 동일성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는 제도가 되는 셈이다.
문신은 신분표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아마 처음의 문신은 샤만과 같은 특정한 지위에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계급이 발생하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구성되면서 문신은 더 다양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문신자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하는 기능을 수행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셜제도의 원주민들의 경우 일반인은 등과 가슴만을 사용할 수 있다. 턱과 얼굴을 장식하는 것은 추장만의 특권이고, 귀족은 팔에 문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신 습속과 같은 정체화의 장치가 없는 익명화된 현대사회의 개인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특정한 종류의 명품 브랜드를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문신 없는 시대의 문신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신은 미적 기능을 갖는다. 아이누족의 문신 민속을 조사한 일본학자들은 문신할 나이가 차서 문신을 한 아이누 여성은 대단히 아름답게 보이기 대문에 남성들에게 매력적 대상으로 여겨진다 했다. 문신 역시 처음에는 신체의 방어라는 일상의 실질적인 역능을 목적으로 생겨났다가 그 주술적 공리성을 바탕으로 공리성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에스키모들이 가늘고 많은 턱의 줄무늬 문신을 아름답게 여긴 것도 사실은 그런 문신을 한 여자가 웃지도 않고 묵묵히 일을 잘한다는 공리적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날 여성들이 예쁘게 웃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보조개를 파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이유로 아름다움을 인식했던 것이다.
문신의 사회적 효과와 욕망의 동일화
문신이 한 사회에서 제도를 통해 이런 의미를 지니게 되면 문신 여부가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되고 정체성이 되고, 나아가 존재의 의미가 된다. 고산족의 한 종족인 타이야 사회의 경우 특정한 문신은 남성의 경우 전쟁능력, 여성의 경우 방직능력의 표상이 되고, 그가 타이야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 혹은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문신이 없다는 것은, 남자는 남자 대접을 못 받고 여자는 출가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문신 자체가 욕망의 중심이 된다. 문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도 감내해야 하고, 특정한 문신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요구하는 각고의 노동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로써 문신의 궁극적 기능이 욕망의 동일화하는 게 아닐까 한다. 어쩌면 이는 통과의례(passage rites)의 일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금지된 문신과 형벌 문신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서 문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문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시민들은 문신을 야만스러운 행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장식적인 문신을 즐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노예나 범죄자들에게 문신을 했다. 때문에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의사들의 문신제거 시술이 번창했다고 한다. 이렇게 문신이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한 사회의 기피자들, 즉 범죄자나 노예 혹은 이단자 등의 피부 위로 옮겨갔다. 그 사회에서의 문신은 문신한 사회의 고유한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고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형벌 기능이다.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고, 기독교가 그 지배를 타고 유럽으로 전파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문신은 여전히 은밀한 가운데 지속되고 있었고, 기독교의 바깥에 있던 이른바 ‘야만적인’ 브리튼・이베리아・골・고트・튜튼・픽트・스코트 족 등은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787년, 당시 교황이었던 하드리아누스 1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문신을 금지하는 공식적인 결정을 내렸다. 물론 그 후에도 교황들의 문신금지령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문신의 근절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고대 삼국은 도래계가 토착계를 정복하고 통합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세력이 결합하여 발전한 경우이고,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으로 출발한 신라는 경주지역의 선주민집단과 박・석・김 세 성씨로 대표되는 유이민 집단이 결합하여 성장한 경우다. 이들의 지배 하에서 상대적으로 문화적 역량이 약한 토착세력들이 자신들의 문신 습속을 유지할 힘은 없었을 것이다.
습속으로서의 문신은 사라졌을 테지만 형벌 문신 외에도 문신은 사적 차원에서 은밀하게 이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종 11년 조에 어을우동이라는 여자가 정이 두터운 남자들의 팔뚝이나 등에 문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을우동은 간통 행적으로 인해 교수형을 당했지만 이런 사례를 보면 남녀 간의 정을 확인하기 위한 문신이 조선시대에도 은밀하게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개괄은 우리를 문신 금지는 고대의 종교나 철학의 보편적 윤리학이었으리라는 추론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 윤리학은 특정 문화가 보편 문화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과 적대 관계에 있던 주변의 문화와 자신들을 구별하여 자신들의 우위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해주었다. 결국 선민의식을 내세웠던, 따라서 문신을 금지했던 유대 기독교적 전통이나 중화적 전통이 문화의 중심을 형성한 중세를 거치면서 문신은 열등과 미개의 표상이 된 것이다.
문신의 귀환
문신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본은 그 귀환의 첫머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문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그림 문신이 증가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1757년에 처음으로 번역된 중국 소설 「수호지」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1805년에 간행된 「신편수호전(新編水滸傳)」이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데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 번역서 안의 삽화였다고 한다. 이 삽화 속에서 유명한 사진・노지심・무송 등의 영웅들은 대부분 일본풍의 용 문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야쿠자의 문신도 상당 부분 이들의 영향 안에 있다.
일보은 1811년 문신을 금지한다. 물론 명분은 문신이 민중의 도덕을 해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문신을 통해 표현되는 반사회적인 혹은 체제에 반하는 불온한 에너지를 금지를 통해 억제하려는 것이었다. 1908년에는 처벌령으로 반복되고 있지만 이미 유행이 되어 있는 것을 금지를 통해 폐지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하층계급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고 범죄조직인 야쿠자들도 그 안에 있었다. 유럽이 일본의 문신과 만난 것은 바로 일본의 문신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무렵이었다.
미국에서 문신은 문신의 속도를 높이는 전기문신기계를 만들 정도로 번창하는 사업이 되었고, 이 유행은 결국 1900년에 무렵에는 미국의 모든 주요 도시에 문신 스튜디오가 생겨날 정도로 확산된다. 세계대전은 문신을 군인들 사이에 더욱 확산시켰고 루 알버츠와 같은 대중적인 문신 디자이너나 찰스 와그너와 같은 문신 예술가를 낳았다.
문신의 사회적 기능 가운데 오늘날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형벌 문신이다. 성형기술 때문에 문신은 더 이상 형벌 효과가 없게 된 셈이다. 조직원들의 문신이든 대중문화 스타들의 문신이든 그것은 인간이 지닌 일탈적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문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외국의 사례나 우리의 경우나 문신은 대부분 청소년기에 이뤄진다. 이들의 문신은 대부분 삶의 불안감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청소년기가 심리적 불안의 시기이면서 그 불안을 넘어 한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시기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 젊은이들에게 문신은 일탈적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자기만족을 느끼게 하거나 심리적 불안감을 지워주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불만을 토로하는 상징적 기호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오늘날 문신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새긴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새로운 문신족들은 고통스러운, 아니 즐거운 새기기 패션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문신하지 않은 사람이 문신한 사람을 이상한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근거가 있다면 ‘다수=정상, 소수=비정상’이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이원론이다.
이제 우리는 이 이원론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들을 비정상인이라고, 그래서 열등하다고 전제하면 우리는 이들을 모두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관계의 폐허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폐허 위를 떠다니며 우리를 감시하는 부당한 권력을 용인하게 할 뿐이다.
문신의 역사가 생각보다 이렇게 깊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대 미이라에서도 문신이 발견된 것이라니! 그리고 문신의 그 사회적 기능이 이토록 다양했을 수 있었나 싶은 것도 새로웠다. 주술, 종족표시, 계급, 미 등의 기능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기독교문화나 중화문화에 의해 부정적으로 인식된 이후로는 형벌적 기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대에 다시 문신이 유행한 것의 계기라면, 19세기 출간된 「신편수호전」의 삽화를 들 수 있다. 인기를 더해가며주로 하급문화나 범죄조직이 문신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서구로 건너가서 기계화된 문신 스튜디오 활성화에 기여하게 된다. 물론 서구에서의 유행은 세계양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몸에 표식을 남겨두는 유행이 한 몫한 것이리라.
문신의 역사를 이렇게 살펴보면서 내면에 갖고 있던 문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말끔히 사라졌다. 주로 청소년기에 문신을 하게 되는 계기가, 어쩌면 그들의 불안과 관계된 것이라는 동기도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문신한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어리석은 편견과 폭력적 이원론이라 저자의 의견이 와닿는다.
청년이 된 조카가 필리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등판에 용을 새기고 들어왔다. 팔뚝까지 내려진 문신을 보노라면 위화감까지 느껴졌다. 물론 뒤늦은 군생활도 무리없이 잘 마쳤다고 한다. 어느날 계기가 되어 왜 그랬는지 물었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 했다. 타향에서 얼마나 스스로 위축되었으면 그랬을려나 싶어서 마음 한 켠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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