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5세기 아테네의 젊은 귀족들은 스포츠클럽과 더불어 살롱에서 ‘향연’을 즐겼다. 클럽이 육체적 놀이의 공간이었다면, 살롱은 지적 놀이의 공간이었다.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사람들이 모여 포도주를 마시며 특정 주제를 놓고 담론을 즐기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재치 있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고라(Agora)에서 연설이나 토론을 통해 재능을 발휘했다. 당시 유일한 살롱은 아테네의 아스파지아(Aspasie)가 운영한 살롱이었다. 그녀의 집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5세기에는 시와 풍자적인 작품이 성공을 거두면서 상류계층의 인사들과 귀부인들이 소설과 산문으로 구성된 ‘소식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모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시신(詩神)의 궁전이라고 일컬었던 ‘무젠호프(Musenhof)’에서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 대화를 만들어 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문학계’는 이탈리아에서 전성기를 맞는다. 17세기에 이르러 ‘문학계’의 모든 사람들은 회원들 간에 긴밀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키케로와 에라스무스를 문체와 대화의 모델로 사용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탈리아 전 지역의 시인들과 스페인 음악가들을 불러들여 아름다운 산문과 시를 즐겼다. 그는 항상 ‘위대한 예술가는 인생의 스승이자 불안 속의 위안’이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살롱의 탄생
클로드 뒤롱은 “글쓰기 이전에 말하기가 있었고 창작 이전에 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 살롱이었다”라고 했다. 당시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로마의 덕목과 프랑스의 우아함을 겸비한 왕비였다. 다정한 대화의 광장을 열자는 인문주의적 분위기가 귀부인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1608년에 랑부이에 후작부인(Mme, marquise de Rambouillet, 1588~1665)이 가장 먼저 살롱을 개장했다.
초기 프랑스의 살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에 있었던 ‘살로네(Salone)’를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식 살롱(salons à l’italian)’으로 불렸다. 18세기 후반까지 ‘살롱’은 많은 손님을 초대하는 개인의 집, 대화나 토론장, 회의 장소, 사교모임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 항상 지식인만 드나들던 곳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살롱은 귀족적 생활양식을 토대로 작은 공간을 통해 남녀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삶과 지혜를 창출하는 문화공간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최초의 살롱
살롱을 개장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당시 프랑스는 프롱드 난 등 40년 동안 지속된 내란으로 인해 사회적인 분위기가 몹시 험악했다. 둘째, 16세기와 17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생활상을 동경했다. 이에 랑부이에 부인은 궁정을 벗어나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랑부이에 부인은 완벽하고 순수성을 가진 예법과 고귀하고 건실한 정신에 재치까지 겸한 지적 분위기로 살롱을 만들고자 했다. 주인 위주의 편안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했는데도 살롱은 성황을 이루었다. 그것은 돈을 받지 않아 부담이 없었던 면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용, 만찬, 관극 등과 같이 궁중에서 즐기는 오락을 도외시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대화를 통해 교제하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생각을 내놓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므로 살롱은 일종의 ‘사교장’이자 지성인들이 모인 ‘사상의 거래소’였다. 이후 17세기에 프랑스 파리 곳곳에 생겨났고, 그 유행은 시골에까지 퍼졌다. 살롱은 풍속을 순화하고 언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은 30년 동안 프랑스의 양식과 매너를 대표하는 학교가 되었으며 예의바른 태도, 기사다운 정중함, 고상한 감정 등을 유행시켰다.
대학은 여전히 교조주의와 자부심에 집착했고 따라서 자신들이 신성시하고 있던 고대인의 가르침과 모순 되는 것, 즉 최근에 발견된 것들을 적대시했다. 살롱이 처음 개장되었을 때는 젊은 여성들에게 진지한 학문이 금지되었던 시대로 주로 소설작품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살롱에서 다루어진 소설작품들은 대부분 금서목록에 오른 것들이 많았고, 18세기 초반까지 주된 테마는 교회와 종교였다.
여성들이 이끄는 살롱문화
18세기까지만 해도 기숙학교를 마친 여성들에게는 더 이상의 공식적인 고등교육의 기회가 없었다. 여성들이 그 이상의 공부를 하려면 사교육을 받든지 또는 살롱을 통해 보다 차원 높은 문화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살롱은 가톨릭 여성들보다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이 운영하는 것이 유리했다. 프로테스탄트 여성들은 고전어에 관한 지식을 가진 아버지에게서 교육받을 수 있었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서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랑베르 부인은 1698년 오텔 드 느베르로 이사하여 살롱을 개장했고, 곧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녀가 쓴 글은 귀족 출신의 여성이 책을 쓰면 안 된다는 당시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충고」와 「딸에 대한 어머니의 충고」라는 제목으로 친구에 의해 출간되었다. 그녀는 고전주의와 계몽주의 정신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사회적 자주성과 예술을 강조했다. 그녀가 살롱 사교계에서 보여준 소박함과 진솔함은 모든 살롱문화의 귀감이 되었다.
그녀는 1727년 몽테스키외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비롯해서 많은 계몽사상가들을 후원했다. 글쓰기에 취미를 가진 랑베르 부인은 1727년 「여성에 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양했다. 1733년 그녀가 사망한 후에도 다른 살롱의 여성들이 그녀의 정신을 추모하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자유에 관한 정신을 실현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살롱은 여성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18세기 전반기의 대표적인 살롱은 달랑베르의 어머니인 탕생 후작부인(Mme. Tancin, 1685~1749)의 살롱이다. 포병장교 데투쉬와의 짧은 연애 끝에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녀는 그 아이를 몇 주 되지 않아 내다버렸다. 이 갓난애가 후일 「백과전서」를 기초한 달랑베르이다. 달랑베르는 어머니의 냉혹함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으며, 평생 가난한 유리세공인의 아내였던 양어머니에게 깊은 애정을 가졌다. 탕생 부인의 살롱은 랑베르 부인의 살롱 손님이었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당국이 강력하게 감시하는 예수회 회원 그리고 대주교와 추기경의 회합장이 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어느 살롱보다 이름이 나있었던 살롱은 조프랭 부인(Mme. Geoffrin, 1699~1777)의 살롱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마리 테레즈 로데(Marie Thérèse Rodet)이고 어머니가 남동생 루이를 낳다가 죽었을 때 한 살이 조금 넘었으며 7살에는 아버지마저 여의고 파리의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 공부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책들을 읽으며 자랐다. 그녀는 탕생 부인이 죽자 비로소 1749년 생 토노레 가 372번지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살롱을 개장했다.
조프랭 부인이 탕생 부인의 살롱에 출입했을 때, 탕생 부인은 “조프랭 부인이 왜 여기 오는지 아십니까? 내가 가진 재산 중 무엇을 떠맡을까 하고 오는 것이지요”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는 당시 ‘살롱의 인기’에 대단한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다. 조프랭 부인은 일주일에 두 번 예술가와 문인들을 자기의 살롱으로 유치하기 위해 그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제공했다. 전형적인 프랑스 로코코 문학 살롱은 모두가 유능한 여성들의 역할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조프랭 부인의 살롱이었다.
데팡 부인은 조프랭 부인의 살롱과 라이벌 관계로 35년간이나 대립했으며, 특히 그들은 파리에 살거나 자주 드나드는 외국의 저명인사들을 자신들의 단골손님으로 만드는 데 보이지 않는 각축전을 벌였다. 당시 데팡 부인은 디드로와 루소를 싫어했으며 볼테르를 높이 평가하고 자주 서신을 교환하였다. 볼테르는 이념투쟁의 최전선에서 영국의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아이작 뉴턴 등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데팡 부인에게 열렬한 편지를 보냈다. 15년 동안 월폴과 1,500페이지, 볼테르와는 소책자 한 권이나 되는 분량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는데, 그 중 955통이 남아 있으며 그것들은 심리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편지로 평가된다.
살롱의 소수문화, 남성살롱
남성들이 여성들의 살롱에서 사교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그것은 남자 지식인들이 사교생활에서 지식과 향락을 함께 추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1760년대 이후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이 남성 살롱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이 주도하는 살롱에서 벗어났는데, 클로드 뒤팽, 알렉상드르 드 라 포프리니애르, 폴 앙리 디트리쉬, 돌바크(d’Holbach, 1723~1789) 등이 개장한 살롱이 그 대표적인 남성 살롱이었다.
엘베시우스 살롱은 돌바크의 살롱과 더불어 당시에 유행하던 아카데미와 여러 가지 협회, 독서클럽, 프리메이슨, 카페 등과 더불어 지성과 문예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했던 것이 확실하다. 돌바크의 살롱과 엘베시우스의 살롱은 여성 사교계에서 다루지 않았던 정치・종교・철학에 대한 토론의 광장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살롱을 통한 계몽사상의 전파
계몽주의 시대의 살롱은 ‘자기중심이 강한 남성들(ego masculins)’이 무사 무욕한 여성들의 후원으로 조화 있게 모여든 장소였다. 살롱에 출입하자면 무엇보다도 자기소개서가 필요했다. 즉, 최소한 몇 명의 사교계 인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출입이 제한되었다.
살롱 덕분에 총명한 여성들은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문학과 예술적 삶의 시련과 고뇌, 불행과 영광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살롱은 여성들을 남성들과 또는 바깥 세상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살롱은 비공식적인 장소로 공식적인 모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사상을 교환하고, 얼굴을 맞대고서 눈과 눈, 표정과 표정, 몸짓과 몸짓, 억양과 억양, 음색과 음색의 다양하고 실감나는 표현으로 효과 있고 확실하게 의사전달을 했으며, 나아가서 사회개혁의 의지를 도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녀들은 계몽사상가들의 생계를 뒷받침해주는 한편, 관직이나 연금을 알선하고 아카데미회원으로 추천하였으며 출판물의 검열, 판금, 신변의 위협 등으로부터 작가들을 보호해 주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문학의 성격이 변한 것처럼 살롱의 성격도 점점 변화되었다. 18세기에는 프랑스어와 프랑스 풍습이 유럽 전체에 파급되었다.
영국에는 그 활동이 우세한 프리메이슨 결사단과 고유한 문학 커피하우스가 있었으므로 문학 살롱의 탄생은 상당한 방해를 받고 있었다. 프랑스의 ‘세련된 예절’을 영국에 전파한 것은 앙토완 아밀통 백작이었다. 그는 찰스 1세가 처형되고 난 후 스튜어트가를 따라 프랑스로 가서 맨 공작부인의 살롱에 출입했다.
혁명시대의 살롱문화와 그 역할
세비네(Sévigné)의 말처럼 귀부인들은 자신의 글이나 책이 ‘서점에서 맞닥치거나’ 또 더 나쁘게 자신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예의 범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시대 프랑스는 파리 고등법원, 파리 신학대학, 파리 사교회, 출판관리국 등 4개의 출판검열기관에서 이른바 불온서적에 대한 사전・사후 검열을 철저히 했으므로 당시 정치・사회・종교・풍습을 문란하게 하는 내용의 서적은 출판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책들은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등에서 출판하여 은밀히 들여와 암암리에 배포되었고, 숨어서 읽어야 했다. 디드로는 1749년 「맹인에 관한 서한」을 발표하여 1년간 벵센 감옥에서 고생을 했고, 루소는 1762년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출판하여 체포령, 금서령, 추방령을 받았다. 볼테르 또한 오를레앙 공과 루이 14세를 풍자한 작품으로 바스티유에서 11개월이나 옥고를 치렀는데, 이러한 예들은 바로 새로운 사상에 대한 당국의 억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주로 ‘편지’가 안전했으므로 ‘편지’를 통해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편지들의 내용이 살롱에서 ‘대화’를 통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전기 '문학 살롱'은 18세기 후기 들어 철학과 정치 살롱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고, 여기에서 혁명사상이 배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혁명을 먼저 경험한 영국 숭배사상이 18세기 프랑스를 휩쓸면서 가속화됐다. 마침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정치철학을 창출하였다. 그 중에도 루소의 ‘사회계약’ 사상과 ‘일반의지론’은 프랑스 혁명가들의 정치교과서가 되었다.
살롱은 계몽사상가들이 그들의 견해와 혁명사상을 교환할 토론의 광장이었으며, 충분히 계몽되지 않는 세상을 공략하는 전초기지였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살롱에서 익힌 이들의 안면은 후일 프랑스 혁명에서 하나의 동지가 되도록 했다.
지롱드파는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점차 질서와 품위를 갖추었으며, 자코뱅들과 달리 너무 시끄럽고 무분별한 공개집회보다는 음식이 잘 차려진 식당이나 우아한 살롱 또는 향수냄새가 나는 여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취향에 따른 대화를 선호했다. 1794년 11월 18일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사라지기까지 사람들에게는 상퀼로트의 보잘것없고 허술한 복장이 인기를 끌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자 파리를 중심으로 정치적・문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살롱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리옹을 유럽의 비단시장으로 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그는 여성들에게 보다 사치스런 의상을 입도록 권고함으로써 보다 신속하게 양식을 변화시켰다.
스타엘 부인은 잠시나마 탈레랑과 연인관계였고, 작가 벵자멩 콩스탕의 열렬한 애인이었으나 나폴레옹과는 불구대천의 적대관계였다. 모반계획을 세운 것이 화근이 되어 한때 스위스로 망명길을 떠났다가 1801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그르넬 가에 살롱을 개장하고 나폴레옹의 독재적인 과대망상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여 추방령을 받고 독일로 향했다.
살롱의 문화사적 의미
문화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습득・공유・전달되는 행동양식과 생활양식 그리고 사고방식의 총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힘의 경쟁, 갈등, 타협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 삶의 세계 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현실적 실천이다.
살롱은 저술가, 학자, 예술가, 궁정인, 군인, 건달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한 담론의 광장으로서 ‘지적 보고’이자 ‘사상적 전투장’이 되었으며, 그것이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사상사적으로나 시대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야 될 것이다.
살롱에 대해 문화사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만을 할 수는 없다. ‘문학계’ 내외에서 형성된 파당싸움을 처음으로 조장한 것이 살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롱 여주인들의 고집과 문인들에 대한 편애에서 비롯되었다. 살롱은 여성들을 타락시키고 남성들을 나약하게 했으며 마침내 남성과 여성이 지켜야 하는 미덕을 파괴시킨 면도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토마스의 지적과 같이 살롱은 여인들에 의해 이끌어진 ‘파당(faction)’의 시대를 만들어 냈다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현재 살롱들은 유럽 전역에서 문화적 활동의 막을 내렸다. 현대 여성들은 살롱을 통한 자유로운 대화와 사교보다 직업을 통한 사회참여와 개인적인 가치추구로 삶의 방향 전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언론이나 대중매체의 좌담, 토론 등은 살롱이 가지고 있던 취약점까지 보완해 주었다.
한 세기를 넘도록 유행했던 살롱 문화는 인류의 진보에 크게 기여한 점이 있다. 유럽 절대왕정들이 두려워했던 프랑스 혁명도 살롱 문화를 통해 다져진 오랜 숙고와 대화의 결과였다고 본다. 언젠가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가 나오면서 우리나라에도 교양과 인문학에 대해 사람들의 선호하는 열기가 뜨겁게 달아 올랐던 적이 있고, 52시간 근무제의 정착으로 젊은 세대로부터 점차 독서모임이나 취미 공유 모임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가끔 뜻하지 않은 저녁자리에서 나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희열이 느껴지곤 하는데 그게 다 살롱문화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요즘 화물연대 파업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대화의 입장이 아닌 '업무개시명령'이라는 강수로 대응하는 걸 본다. 도무지 대화가 안되는 정부처럼 보인다.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데, 너무 사측에 편중된 의견만 개진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다음 정부는 대화가 가능한 정부이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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