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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종교

[북리뷰] 부족한 기독교

by 체리그루브 2018.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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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2013

 

 

 

저자는 故옥한흠 목사의 장남으로, 성인이 된 이후에나 제대로된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는 고백을 한다. 그의 신앙적 토대가 된 존경할 만한 스승 중엔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가 있다는 것에 왠지 호감이 갔고,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반박을 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게 된 것이 무척 부러웠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기독교는 성경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것인데, 왜 자꾸 세상의 심리학을 끌여들여 보완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

 

요즈음 많은 교회가 세상이 이미 주고 있는 것을 또 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바로 가르치는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어 말을 잘 하는 사람의 설교가 더 인기가 있는 현실입니다. (38)

 

 

 

기독교에서 실시하는 내적치유를 들여다 보면, 어린 시절의 자아와 화해하는 것이나, 자기애를 우선시하는 것들이 보인다. 사실상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인 죄성과 다루지 않고, 심지어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더더욱 거리가 있어, 우리를 자칫 성경의 진리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토로한다. 

 

심리 치료에 있어서 인간 문제 해결은 결국 자기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시먼스의 경우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구원 또는 ‘내적 자아로까지 깊이 침투하는 구원’은 ‘자기 사랑의 회복’일 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아닙니다. 기독교 상담 관련 책들 속에 등장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읽어 보십시오. ‘자기 사랑’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16)

 

기독교 심리학자들에게 성경이 이토록 강조하는 하나님의 진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것, 즉 내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별 중요한 주제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들은 심리학의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여 인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과 비교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는 것’은 훨씬 쉽고 간단한 수준에 불과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102)

 

 

어쩌면 오늘날의 교회는 다윈은 부인하면서, 프로이트에겐 관대한 면이 없잖아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 동안 교회는 성경의 진리를 다윈의 진화론에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쩌면 다윈의 진화론보다 더 교묘하고 무서운 프로이트나 융 그리고 로저스 등이 제시하는 인간 본질에 대한 심리학 이론에는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 이론들에 맞추어 성경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두렵고도 안타까운 일입니다.(111)

 

 

심지어는 기독교 심리학자들로 이루어진 학회에서조차 오늘날 프로이트가 태어난다면 기독교인이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괴변을 늘어놓기까지 한다고 하니, 실제 프로이트가 기독교를 얼마나 비판했는지 기억 상실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부분이다.

 

 

프로이트는 그렇다치고 칼융은 기독교를 인정했다고 해서 나은걸까? 칼융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식으로 말하면, 귀신들린 사람처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괴했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집단무의식 개념으로 발전 시킨 인물이다.

 

 

 

이 집단 무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마다 상이한 개인 무의식과는 달리 인류 보편적인 성격을 띈다는 점입니다. 융은 이 집단 무의식은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 인간이 동물일 때부터 이어 내려온 잠재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잠재된 기억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 세상에 편재되어 있는 인류의 각종 신화들, 종교들, 의식들, 상징들 그리고 꿈과 환상 등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 집단 무의식은 개인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융에게 기독교는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무의식의 잠재된 기억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단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139)

 

 

칼융이 기독교를 긍정했던 것은 일종의 신화적 관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이어 저자는 "자존감"라는 단어에 무한 긍정을 보내는 기독교 강단을 비판한다.

 

 

오늘날 동기부여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 특성에 대한 심리학 이론을 보면 마치 자신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윤리적 원칙의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의 여부는 그것이 내게 어떤 보상을 주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객관적인 윤리적 원칙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바로 나에 대한 나의 사랑, 자존감입니다. 나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옳고 좋은 것이며 나의 자존감을 낮추는 것은 나쁘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이 지극 정성의 자기 사랑에 따르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비판적 사고 만큼 자존감에 해를 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남을 비판하는 것, 부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 됩니다. 왜 비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판 자체가 자아에 손상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154)

 

 

자존감은 곧, 자기실현, 자기 충족에 가 닿는다.

 

 

자기 실현(Self-actualization), 자기 충족(Self-fulfilment) 등의 각종 용어로 대표되는 자신에 대한 이 애틋한 자기 사랑이 기독교 속으로 들어온 지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기독교 상담 심리 속에 자존감으로 대표되는 자기 사랑의 영역이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상 이제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사랑해야 할 목적이자 이유가 되었습니다. (155)

 

 

이러한 자존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진짜 악독한 범죄자일수록 엄청나게 높은 자존감, 자신에 대하여 엄청나게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합니다. 자존감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곡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쩌면 범죄의 더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165)

 

 

오늘 포트라인에 서신 MB도 위와 같이 높은 자존감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 기독교는 더이상 자존감 운운하는 위로 따위일랑 접어야 할 것이다. 서점에 가면, 비슷한 류로 기독교 아닌 서적도 한 트럭이니 말이다.

 

자존감 말고도 "긍정의 힘"으로 분류되는 자기계발분야로 퍼진 변종 심리학도 유행처럼 번진다. 슐러 목사는 얼마전까지 미국의 대표적인 메가처치였다가 파산한 크리스탈 교회의 목사였다. 그가 늘 외치던 "할 수 있다" 신앙에 대한 저자의 말이다.

 

 

슐러에게 있어 성경은 반복적으로 암송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종류의 동기부여를주는 구절이 다수 포함된 하나의 자료집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89)

 

 

스스로에 대한 믿음, 신뢰를 강조하는 강단에는 다음의 말이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고 그 중에서도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신뢰했다면 무엇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203)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강단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런 모세의 부정적인 말 때문에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 내시려던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었습니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혀에 놀아나는 그런 신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284)

 

 

 

생각과 태도에 따라 결과가 결정 난다면 왜 이스라엘은 그 큰 여리고를 무너뜨린 후에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가 싸운 아이 성 전투에서는 대패했습니까? 아니, 당연히 이긴다는 패러다임으로 나간 전투에서는 지고 당연히 질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나간 전투에서는 이기는 결과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왜 그렇게 자주 반복되는 것일까요? 그 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말과 관계없이 피조물 너머에 홀로 완전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그 답이 있습니다. (295)

 

 

종종 기독교 강단에서는 심리학의 상상기법도 성경의 해석에 맞춰 선포된다. 

 

 

생각한 대로 된다고 하는 심리학의 상상기법은 어느 특정한 몇 사람만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너무 널리 유통되고 있습니다.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라! 그러면 그린 대로 된다.’, ‘꿈을 꾸라! 그려면 꿈대로 된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러면 목표한 대로 이루어진다.’ 라는 식의 내용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성경적인 것 처럼 설교되고 있습니다. 심리학의 상상기법을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처럼 오해하면서 상상기법을 사용하라고 가르치는 설교가 비일비재합니다. (296)

 

 

요즘은 뉴에이지라고 하면, 시대에 뒤쳐진 용어처럼 보이지만 "영성"인데 기독교와 전혀 다른 영성을 추구하는, 그래서 기독교인도 헤갈려 하는 이 단어를 도무지 요즘은 뭐라 부를지 몰라, 먼지 자욱한 뉴에이지라는 단어를 꺼내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에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생각했겠는가.

 

 

오프라 윈프리는자신의 쇼와 잡지를 통해 뉴 에이지 사상의 중요 사상가들을 미국인의 일상 삶 속에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들도록 만들고 있는 인물입니다. 미국인들이 기독교와 뉴 에이지가 무엇이 다른지 전혀 구별하지 못하도록 혼동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사실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입니다. (298)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물질우선주의라는 틀 안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일 수 있겠다.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입니다. 개인의 꿈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성공’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교회 성장의 비전은 기업 확장의 비전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비전을 품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의 비전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인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299)

 

 

하나님을 마징가에 비유한 저자의 독특한 비유도 꽤 신선했고, 경각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

 

 

자연주의 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이러한 마징가 제트와 같은 존재입니다. 쇠돌이가 마징가 제트를 조정하듯이 인간이 성공의 법칙을 활용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힘을 끄집어 내지 않는 한 하나님은 무력하게 계속 서서 기다리실 뿐입니다. 인간에게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지만 줄 수가 없는 가련한 존재입니까? 쇠돌이가 빨리 와서 조종해 주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300)

 

 

 

만일 내가 믿으면 반드시 들어 주어야 하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면 자연 종교에서 믿는, 세상에 숱하게 존재하면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인간을 도와 주는 각종 다른 신들 또는 영들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301)

 

 

이렇게 입으로 주문외는, 그리고 간절함으로 소망하는 기독교를 보고 입으로 쌓는 바벨탑을 얘기한다.

 

 

과거 인간은 몸으로 돌을 날라서 바벨탑을 쌓았지만 이제는 말과 상상만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바벨탑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할 우리 교회가 도리어 이 바벨탑을 세상과 함께 쌓고 있지 않습니까? (305)

 

 

 

특별히 기대하지 않고 책을 들었는데 소득이 많은 독서였다. 만약 내가 이분처럼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할 수 있다면 과연 이런 인문적 소양을 두루 갖출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리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몇몇 기독교 저술가도 경계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어쨌든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비판적 시각을 늦게나마 갖게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결론을 들어보자.

 

심리학은 성경이 말씀하는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 대신 알 수 없는 미지의 에너지로서의 신 또는 내 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나의 모습으로 바꿔치기 했습니다. 또한 심리학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죄성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심리학은 노골적으로 성경의 진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성경 말씀을 토대로 믿음을 지키고 싸워야 할 교회가 도리어 심리학을 마치 성경 외에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계시인 양 모시고 있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309)

 

 

 

우리가 성경의 충분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현재 큐티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몇 구절 정해진 본문을 읽은 후 적용거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수준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의 전체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성경을 진지하고 깊게 읽어야만 합니다.(320)

 

 

 

저는 앞으로 오늘의 우리 교회가 성경과 반대 되는 여러 가지 사항을 가진 세상의 이론을 추종하지 않고, 또 적극적으로 이런 세상의 이론을 성경의 진리로 굴복시켜서 교회 안에서 추방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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