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상화하는 사람들의 원한은 무엇을 노리는가? 지금으로서는 모든 진단이 추정에 지나지 않지만, 내 진단을 뒷받침하는 견실한 실증적 작업이 많다. <인간성으로부터 도피>에서 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인간이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하는 감정에 고통 받는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수치심이란 무력하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수치심이다. 조숙한 젖먹이의 인식적 성숙성은 극도의 신체적인 무력함과 결합하여 어린이가 원하는 대상에 매달릴 수는 있지만 그것을 취득할 능력은 전혀 없는 긴 기간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지력의 증가는 (대상이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것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무력감을 몰고 오는데 이는 끊임없이 보살핌을 받을 것에 대한 기대감과 뼈아프게 대조되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어린이들에게 어느 정도씩 존재하는 감정으로, 심리학자들은 이를 '유아기의 전능감'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나는 세계의 중심이야. 그럼에도 이렇게 춥고 배고프고 젖은 상태로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떠오른다. 다른 모든 수치심처럼 원초적 수치심도 바라는 특성이나 완벽성을 갖지 못한 데서 오는 고통이다. 그것을 원초적 수치심으로 분류하도록 만드는 요소는 고통을 유발하는 인자가 불완전한 인간성 그 자체라는 점이다. 질병과 불완전성 같은, 우리가 더 이상 자궁 안에 살지 않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현실적 조언이다.
성장함에 따라 원초적 수치심은 다양한 방법으로 변이된다. 어린이들은 그들이 상호의존적인 존재들로 이뤄진 세계의 부분이고,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줄 수 있음을 배운다. 자활하는 법, 덜 무력해지는 법을 배운다. 이 모든 것은 수치심을 줄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결코 완전한 통제력을 가질 수 없고, 그 때문에 완전성과 충만성을 여전히 갈구하는 수준만큼, 수치심도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들이 죽음의 운명을, 누구나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을 인식할 때, 그러한 사실에 대한 수치심은 증폭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깊은 곳에서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이 원초적 수치심을 떨쳐내는 아주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다른 어떤 집단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 모욕하는 사람은 (수치심으로부터) 안전해진다.
수치심을 강화하는 것은 이상적인 어른을 자족적이고 독립적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별로 필요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몇몇 사회의 경향이다. 많은 사회에서 그러한 이미지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여자들보다 남자들에게 훨씬 자주 각인돼 있다. '진정한 남자'는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결코 의존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회에서 드러나는 성장유형의 매우 흔한 특성이며,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외로운 카우보이를 높이 치는 우리 사회에서도 마찮가지다. 그와 대조적으로 여자들에게는 다른 이들과의 상호의존성도 성숙함의 일부라고 자주 가르친다. 따라서 통제의 결핍은 다른 규범에서 자란 사람보다 남자의 신화를 주입받으며 자란 사람에게 더욱 위험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신화일 뿐이며, 매일의 일상을 통해 그 실상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수치심은 신화의 압박 속에서 자란 사람들의 심리 깊숙이 흐른다. 나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진정한 남자'여야 마땅한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실 속에서 그렇지 못한 것을 느낀다. 심리학자 댄 킨들런과 마이클 톰슨은 미국에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남자아이들을 여러 해에 걸쳐 연구했다. 그들은 '힘과 극기심을 요구하는 남성성의 지배적인 이미지'가 '잔혹의 문화'를 형성해,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 못했다고 느끼는 남자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이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모욕하는 양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 짓는다. 지배, 공포, 배신에 관한 모든 교훈을 통해 남자아이는 신뢰, 공감, 관계 같은 가치로부터 멀어진다. 이 동년배 문화는 수치심을 스포츠의 자극제로 삼으로써, 그래서 선수들이 굴욕을 피하려 최선을 다하게 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한편 문화 속에 깃든, 감정에 대한 대화의 양식도 수치심과 공격성을 더욱 키운다. 어머니를 비롯해 어른들은 흔히 남자아이들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여자아이들은 훨씬 관심이 많다고 단정한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불안정성을 정확히 말하고 반영하는 언어를 배우지 않고, 이로써 그들을 더욱 외부에 대해 공격적이 되게 할 공산이 크다. 킨들런과 톰슨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느낌을 말하지 못했다. 따라서 남자아이들이 스스로 약점과 타협하는 데 도움을 주고, 수치심을 줄여줄 수 있었던 기술은 배양되지 못한 채, 문화에 의해 더욱 강화된 원초적 수치심은 그들 속에 숨어, 적절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 어둠 속 수치심은 이후 사나운 증폭과정으로 이어진다. 내면의 현실이 남자아이에게, 바람직한(하지만 불가능한) 규범을 모범으로 보여주는 데 실해했다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다른 누군가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더욱 극심해진다. 그러나 이 지배의 목표는 그 자체로 불안감에 휩싸여 있고,궁극적으로는 수치심을 줄이기보다 도리어 더 키운다.
'잔혹의 문화'가 그 절정에 다다르는 바로 그 시기에, 남자아이들은 사춘기를 통과하면서, 끊임없는 성적 충동을 경험한다. 동년배의 문화에서 친절과 공감은 '나약한' 감정일 뿐이며, 오직 지배만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들에게 섹스는 오직 지배와 통제의 문제일 뿐, 다정함과 부드러움은 나쁜 것이라고 배운다. 남자아이들은 섹스능력을 놓고 불안해 하지만, 그 두려움이나 고통을 다른 남자아이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적대감과 분노다. 진정한 친밀성은 '세심함, 존경, 다정함'을 필요로 한다고 심리학자들은 지적한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와 맞물려 남자아이들은 이 요건들을 여성적인 것으로 비하하고, '힘, 지배, 그리고 세심함의 거부'가 훌륭한 성품이라고 가르치는 문화의 지배를 받는다.
한편, 남자아이들은 빈번하게 자위행위를 하면서 그 경험에서 일정한 만족감을 느끼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 경험이 그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혹의 문화는 남자아이의 환상을 형서하고, 그로 하여금 '성적 기억의 도서관'을 짓게 한다. 이 곳에서는 실제세계에서 자신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도 있는 다른 여자들에 대해 그가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통제권을 중시하는 문화의 특성상, 그는 곧 여자들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물건처럼 취급되는 환상의 세계를 더 좋아하게 된다. 여자들을 한낱 물건처럼 취급하고 그들을 지배하려 시도함으로써, 그 환상의 세계를 현실 속에 복제하고자 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포르노 이미지들은 여자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여자들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강화한다.
요약하면, 킨들런과 톰슨이 상세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은 '원초적 수치심'에 대한 내 분석이 제시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완전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데 대해, 삶의 불안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성적 특질은 이러한 불안감이 극도로 돌출되는 분야다. 그러나 이 불안감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다른 이에게 안기는 수치심이 어느 지점에서 포기되고 연민으로 대치되는지, 또는 공격적인 대상화의 형태로 전환되는지는 문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오토어드밋에서 대상화를 일삼는 남자들은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 그들은 킨들런/톰슨의 분석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우리는 어떻게 인터넷이 영향력 있고, 안정적이며,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여자들에 대한 젊은 남자의 공격적인 반응을 부추기는지 알 수 있다. 환상 속에서, 남자들은 자신을 완전히 숨긴 상태에서 그 여자들을 지배하고 처벌할 수 있다. 남자에게 안기는 수치심은 그 자신의 수치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완벽한 통제가 되지 않는 어떤 상태도 나약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치는 남성지배문화에 의해 교육되고 강화된다.
<불편한 인터넷> (p.138-142)
'THINKING > 독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적 예수의 기원 (0) | 2019.01.05 |
---|---|
문학평론 관련 글 (0) | 2018.01.18 |
나는 별일 없이 잘 산다 (0) | 2013.12.13 |
훌륭한 리더의 조건 (0) | 2013.06.08 |
리더의 변덕스러운 통제 (0) | 2013.06.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