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씨의 GEEK 2013.01 에 기고된 글이다. 사연많은 남자였다. 일생일대의 변화를 맞이한 순간의 전후를 잘 묘사해 주었다. 그의 감수성에는 그날의 회한과 스스로 설득하기 위한 과정으로 비롯되었다는 문장드링 유독 마음에 와 닿는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추운 겨울 밤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피시통신에 접속했다. 새 글을 살펴보다가 가스렌지에 물을 올려놓고 TV를 틀었다. 지금 라면을 끓이면 엑스파일 시작하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하고 좋은 밤이었다.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전화벨이 울렸다. 라면 스프를 털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격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랑 전화를 그렇게 오래 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피시통신 하고 있었는데… 엄마였다. 내 말의 끝자락을 잘라 먹고 엄마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여기 작은 외삼촌 집이다. 택시 타고 얼른 와서 데려가라.
아무래도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나는 라면 먹기를 포기하고 집을 나섰다. 군데 군데 얼어붙은 길을 총총걸음으로 건너 택시를 잡아 탔다. 중흥동 가주세요.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아마 외삼촌과 싸운 모양이었다.
지난 수년 간 나와 내 동생은 엄마와 살았다. 부부가 갈라서면서 엄마 가족이 있는 광주로 이사를 왔다. 외가는 광주의 꽤 알려진 부잣집이었다. 외삼촌들은 사업을 하거나 정치를 했다. 어렸을 때는 방학에 이곳을 찾아 외가의 사촌형들과 노는 것이 사는 낙이었다. 일년 내내 가장 기다리는 만남이었다. 아무튼 그건 우리 어린 아이들의 사정이었고, 어른들의 사정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유산이 남자 형제들에게만 돌아가는 바람에 얼마 전부터 전화로 고성이 오가는 일이 잦았다.
외삼촌 집들이 모여있는 아파트촌에 도착했다. 원래 외할아버지 집은 여기서 몇 백 미터 떨어져있지 않은 큰 양옥집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재산을 정리하면서 삼촌들은 여기 아파트를 마련했다. 추억이 많은 외할아버지 양옥집은 지금 고깃집으로 바뀌어있었다. 계단을 걸어올라가 작은 외삼촌 집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눌렀고,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외삼촌이 우리 엄마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외숙모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냥 그대로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머리가 띵하고 땀이 났다. 내가 온 것을 눈치 채고 외삼촌은 손을 거두었다. 나는 그 큰 평수의 아파트 거실을 천천히 가로질러 엄마 앞에 섰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저쪽의 방에선 나와 동갑인 사촌 여자애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저 여자 좀 우리집에 오지 말라고 해!
나는 엄마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신발장으로 끌고 갔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엄마에게 신을 신기고 나도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작은 외삼촌 안녕히 계세요.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도 종종 생각해본다. 외삼촌을 패대기치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부해야하는데 시끄러우니까 저 여자 좀 우리집에 오지 말라고 해, 라고 외치는 저 철 없는 사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온 동네를 질질 끌고 다녔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그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던 것이다. 작은 외삼촌 안녕히 계세요.
구청장이라는 외삼촌의 직업 때문이었을까. 우리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으리으리한 아파트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엄마가 창피해서였을까. 이 시간에 돈 받으러 와서 외삼촌에게 얻어맞고 있는 엄마가, 창피해서였을까.
맞다. 나는 엄마가 창피했다. 이후로도 그랬다. 뭘 해보겠다며 식당에 나가서 설거지를 하다가 손목과 무릎이 상해 며칠을 드러누워 있을 때도 그랬다. 우리에게 말도 안하고 리어카에 양말을 가득 싣고 나갔다가 며칠만에 포기하고 다시 드러누웠을 때도 그랬다. 꼭 받아야 되는 돈이라며 남편도 없이 홀로 친지 가족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랬다. 등록금과 집세를 벌기 위해 하루 아르바이트를 세개씩 하고 고시원 옆방 아저씨가 먹고 내어다 둔 짜장면 그릇에다 몰래 밥을 비벼 먹을 때, 우리 아버지는 교수고 어머니는 부잣집 딸인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냐며 어리고 치졸한 마음에 한 평 짜리 방 안에서 술을 마시고 벽을 걷어찰 때마다, 나는 부모로서의 엄마가 여자로서의 엄마가 어른으로서의 엄마가 창피했다.
그래서 또한 동시에, 나는 그녀에 대해 늘 근심하고 연민을 느꼈다. 안타깝고 슬펐다. 나는 지금도 엄마의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챙겨주려는 말들이 귀찮게 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나 사이에 얽혀있는 감정들이 새삼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꾸 내가 엄마를 다그치고 거꾸로 훈계조가 되는데, 이건 서로를 위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 가족의 신화에 대해 모든 신뢰를 잃었다. 그보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대하는 방법을 더디게 배워왔다.
그날 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엄마는 내게 말했다. 엄마가 맞고 있는데 욕은 못해줄 망정 인사를 하고 나오냐 너는? 그때 내가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그날 이후 영영 달라졌다. 힘들 때마다 내 비굴한 웃음을 기계적으로 떠올리며, 그날의 나를 해명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 웃음을 떠올리면 나는 아무리 나쁜 것도 마냥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고, 제 아무리 아름답다는 것도 마냥 아름답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알량한 상처의 총량을 빌미로,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를 아무 것도 아닌양 무마해버리는 비겁함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이 영화나 연속극이라도 되는양 타인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계기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거나, 최소한 보상받으리라 상상한다. 내 상처가 이만큼 크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고 오해받고 있고 너희들이 내게 하는 지적은 모두 그르다, 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결국 응답받지 못한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계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연민만 아니라면, 자기혐오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물론 사랑으로도 살 수 있겠지만 그건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거다. 행복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세요 사랑하세요, 같은 말을 떠벌이며 거만할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별 일 없이 잘 산다.
허지웅
GEEK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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