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은 한국 문학의 '리트머스 시험지'
이문열은 한국문학의 모든 모순을 구현하고 있는 상징이자 실체이다.(23)
많은 사람이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소설시장에선 오히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이른바 '세의 법칙(Say's Law)'이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34)
'스타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문열이 누리고 있는 인기의 이유를 모두 이문열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건 매우 어리석은 설명이라는 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35)
'대담한 권력'은 그만큼 위험도 크다. 설준규가 『영원한 제국』에 대해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은 이문열의 권력이 범국민적 '식중독의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걸 시사해주고 있다.(39)
작가의 이런 노골적인 개입에 따라 소설의 공간은 돌연 작가 자신의 왜곡된 세계관을 전파하는 지루한 설교장으로 화하고, 인물은 상황과 사건 속에서 살아 숨쉬는 성격이 아닌 생명 없는 인형으로 화한다.(48)
그간 세월이 흘러 진보적 문인들은 많이 변했다. 소설을 이데이올로기에 종석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말없이 그런 주장을 끈질기게 실천으로 옮기는 문인이 있다. 누군가? 바로 이문열이다.(48)
이문열의 혼란 속에서 등장 인물이나 주인공은 작가의 노골적인 육성을 전달하는 하나의 인형으로 전락하는 한편, 작가는 등장 인물의 가면을 쓰고서 자신이 공격하고 싶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대상을 마음껏 짓밟고 조롱한다.(50)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문열의 소설은 잘 팔린다. 나는 그 이유로 앞서 지적한 공격적인 마케팅과 문단 전반의 인준 이외에도 『이문열과 김용옥』에서 한국 사회 특유의 '지식폭력'과 그에 따른 '교양주의'를 들었다.(59)
『레테의 연가』뿐만 아니다. 그의 많은 소설이 소위 정통 세계 문학과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젊은날의 초상』은 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찐트』나 『데미안』을, 『사람의 아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중 <대심판관>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토마스 울프의 동명소설을 연상시켜준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필자가 언뜻 느끼는 생각이 아니라 작가인 이문열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61)
이문열의 서양 이용은 독자들을 현학으로 주죽 들게 해서 사로잡기 위한 '교양주의'의 용도일 뿐, 그의 정신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62)
위의 발언 또한 문학 전문가의 불평일 뿐이다. '교양 욕구'에 굶주려 있는 일반 독자들은 이문열의 '안내와 강의'를 싫어하지 않는다.(64)
이문열이 누리는 인기의 이면에는 '담론의 사망'이 있다.(67)
이문열이 자랑하는 '교양주의'가 반지성주의와 통한다는 건 결코 아이러니가 아니다. 그의 '교양주의'는 어차피 '지식폭력'의 산물이었으므로.(68)
미당 서정주를 이용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유력 신문사가 나서서 문학상을 제정했다는 데에 있다. 문인들이 주체가 된 문학상 제정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사의 경우엔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신문사, 특히 중앙일보사는 '정치적 조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71)
현정부가 '언론탄압'을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중앙일보』가 정부의 판단을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된다. 그게 바로 『중앙일보』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내렸음을 실토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72)
『중앙일보』의 '미당 문학상' 제정에 찬성하는 문인들이 적지 않다는 건 분명한 사실인 만큼 그들의 자기 모순적인 행태를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다.(72)
당연히 권력 가까이 있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권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은 그가 정치적 관료가 아닌 바에야, 문제의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 현대사의 권력은 역사에 대한 독재이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폭행이었던 바, 미당의 친권력적 행보는 그 폭행의 감싸안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78)
"서정주! 당신의 이름은 저에게 넘어야 할 시의 산맥이자 어린 날 잃어버린 제 육신의 아버지의 자리에 든든하게 서 계시던 아버지의 또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문정희의 미당 예찬
(82)
비록 도덕적인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라 해도 대통령의 전용기에 앉아 대통령과 함께 공항을 나서는 시인보다는 진실로 고민하고 사랑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시인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83)
미당 옹호자들은 '분리주의 미학'의 포로이기 때문에 미당을 옹호하는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역시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분리주의 미학'이외에도 자신들의 '보수주의적 삶' 또는 '세상에 대해 닫힌 삶'에 대한 표창을 서정주 옹호를 통해 얻고자 한다고 생각한다.(101)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정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서정주의 문학관을 실천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서정주와 맺은 개인적 관계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의 서정주 옹호는 서정주를 위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서정주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102)
왜 진보적 문인마저 김정란을 불편하게 여기는가?
남자의 야심에 대해선 "그 친구 만만찮아" 라는 식으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반면, 여자의 야심에 대해선 성격적으로 무슨 결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심리분석에 임하는 게 남자들의 일반적인 행태였다.(117)
'릴케의 시집'과 '유대인 학살'
'감정 싸움'은 그들에 ㄷ해 많은 것을 검증해주고 폭로해줄 수 있다. 이건 '감정 싸움'이 아니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매우 귀중한 정보이다.(157)
그런데 나는 남진우와는 무관하게, '현실 계몽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한 가지 이의를 갖고 있다. 나는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의 철저하게 세상을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산다면 그들의 뜻을 존중할 뜻이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현실 세계에선 강장, 특히 수구신문들과 밀월관계를 누리고 있다. 나는 이건 큰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고 하니 수구신문들은 '상업주의적 역(逆)계몽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며 '현실 계몽주의'를 싫어한다는 사람들은 시문들의 그런 성향에 부화뇌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현실 계몽주의'를 싫어한다는 건 자신들의 수구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속임수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159)
릴케의 시집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던 나치 장교가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유대인 학살 명령서류에 서명할 수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우리의 문학은 곧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179)
"식인의 경우 실제 삶과 이론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 있"다며 그걸 정당화하는 논리로 대응하는 것도 온당치 않은 것 같다.(190)
"그는 좋은 비평가이지 이론가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텍스트의 원개념과 남진우의 다독에 따른 그 자신의 자의적 해석 사이에 미세한 충돌이 있을 때, 비평으로서는 아주 흥미 있는 의미의 확장과 파장이 가능해지나, 이론의 눈으로 볼 때는 허술함을 노출 시키기도 한다."(193)
① 극우신문과 유착해서는 안된다. ② '상업주의적 주례사 비평'을 해서는 안된다. ③ '마초' 근성을 가져선 안된다. ④ 비판에 대해 성실한 반론을 펴고 비열한 인신공격을 해선 안 된다. ⑤ 잘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쥐뿔만큼 아는 걸 과시하려 해선 안 된다. ⑥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196)
한국 문단의 추악한 남근주의
좌파. 진보적 지식인들의 '지식폭력'
일부 좌파.진보적 지식인이 저지르는 '지식폭력'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도덕적 우월감'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지식폭력'과 또다른 하나는 '입으로만 떠드는 거대담론'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지식폭력'이다. 나 같은 사람도 '도덕적 우월감'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지식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기 대문에 나는 이에 대한 비판을 환영하며 스스로 늘 경계하고 있다는 걸 밝혀둔다.(221)
문학권력 논쟁은 기본적으로 문학자본과 문학권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세력 증식을 위해 문학의 창조적인 속성을 훼손하는 걸 문제 삼고자 하는 논쟁이다.(223)
나는 한국 사회에서 '발상'은 과잉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실천이다. 나는 담론을 '발상적 담론'과 '실천적 담론'으로 구분하고 싶다. '실천적 담론'은 그 담론 수용자의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인 반명, '발상적 담론'은 단지 이해에 그치는 담론이다.(225)
대체적으로 보아 적어도 지시계에선 자기가 실제로 서 있는 이념적 지점보다 훨씬 더 왼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 윤지관처럼 말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지식계 일각의 자기 동네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누리려는 속셈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231)
『문학동네』는 『문학권력』이라는 책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기 때문에 긴 말 않겠지만, 그 동네는 문학판의 『조선일보』다. '보수'는 물론 '진보'까지 껴안고 팔겟다는 것이다.(235)
지금은 다국적기업들의 선진 구호로까지 전략해 맛이 좀 가긴 했지만, 나는 '생각은 지구적으로 실천은 국지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국지적 실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아니 국지적 실천을 방해까지 하면서, 지구적으로만 생각하고 그걸 실천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238)
내가 갖고 있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① 파시즘 및 매카시즘 타파 ② 극우신문 제몫 찾아주기 ③ 부정부패 척결 ④ 서울대 패권주의 종식 ⑤ 일상적 권위주의 극복 ⑥ 지역감정 청산 ⑦ 모든 차별 척결 등이며 대안은 그런 못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실명비판하는 일종의 '여론투쟁'이다.(239)
"푸코는 진리와 정의의 주인으로서 발언하는 '보편적 지식인'이 되려는 야심을 결별하고, 권력과 특권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 만족하는 '특정적 지식인'상을 만들어냈다."(242)
"너 푸고 알아? 나는 알아." 이게 바로 아주 못된 '지식폭력'이라는 거다.(243)
'백낙청 사단'의 '영문학 패권주의'에 대한 의혹
문학권력 논쟁을 하는 사람들은 '권력 무용론'이 아니라 '권력 행사의 정당성과 합리성에 대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275)
이문열의 소설이 자본으로 어떻게 밀어붙여졌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어떤 도움을 받았으며 문언유착으로 신문들의 어떤 지원사격을 받았고 문단 내부의 어떤 패거리의 박수갈채를 ㅏ받았으며 이런 것들이 텍스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걸 따져야만 이문열 소설의 '대중성'이 온전히 규명될 수 있는 것이다.(280)
"문학을 '종교의 대용품'으로 끌어올리려는 입장에서의 가상한 비평 홍보요 비평 격상 시도였다."(285)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불안한 존재이고, 또 불안해야 할 존재이다. 지식인과 안정은 양립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를 묻지 못하는 지식인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개입할 수 없다."(294)
학력과 학벌은 계급이다
서울대 출신은 '문화특권'을 누리면서 '지식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육사 헤게모니' 체제하에서 큰 재미를 보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307)
중하층 계급 출신의 학생들은 그들의 학교에서의 실패로 그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학교에서 그들의 원래 가족문화와 학문적 성공의 문화적 기준 사이에 존재하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를 잘 알게 된다. 교육시스템의 이러한 기능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상황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 메커니즘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학교가 산업의 필요에 부응해 산업계와 실업계의 책임 있는 지도자를 길러낸다는 테크노크라트적인 견해는 교육제도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반영에 불과하다.(309)
바로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서울대 문제의 해결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장벽은 '지식폭력'이다. '서울대의 나라'가 이미 '헤게모니'로 굳어진 것이다. (320)
학연주의와 학벌주의가 비난받아 마땅한 악덕이라면 그런 악덕을 가장 철저하게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324)
나는 교수 채용문제가 대학개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왜? 학연과 정실에 의해 채용된 교수는 이미 '지식인 포기각서'를 쓰고 교수가 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332)
왜 똑똑한 문인도 '신문'엔 이성을 잃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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