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오늘이 있기까지에 있었던 수많은 정치적 파행과 권력의 생성과 정경유착, 권언유착을 알 수 있었다. 저자 강준만이라는 사람이 왜 그토록 언론의 개혁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지를 전율을 느끼며 동감했다. 조선일보는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몫만 챙겨야 한다는 타당안 논리에 탐복했으며, 중앙일보와 같은 재벌언론들의 자사 감싸기가 안고 있는 병폐를 알 수 있었다. 모두들 역사 앞에 참회할 줄 모고서는 더이상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 모든 것은 과거로부터 반성할 줄 모르는 기득권 세력과 이를 쉽게 망각하는 민중의 무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한다.
이것은 단순한 교양주의를 벗어나 알권리와 우리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보호에 대한 차원에서의 주장이다. 이책은 이제 세상에서 선보이지 않는다. 절판된 도서다. 그래서 안타깝다. 다만 인터넷으로 여러 사람의 손에 손을 거쳐 다니고 있다. 모두가 함께 읽고 공감하게 되길 바란다. 다음은 일종의 요약이다.
1. 개화기의 언론 I (1883~1898)
최초신문 : 한성순보(1883)→한성주보(1886)→한성신보(1895)
급변동기 : 동학혁명(1894)→청일전쟁(1894)→갑오경장(1894)
→을미사변(1895)→아관파천(1896)
한성신보(1895)
: 우리 신문없던 공백 기간 중 엉뚱하게 일본인이만든 한글 신문
독립신문(1896)
: 우리 최초의 민간 신문 한성신보에 대응해 발간.
창간자 서재필의 친미적 성향, 그의 이름 필립제어슨
의병을 비도로 부른 사실 등 비판 받음
독립신문의 정신을 이어받자(조선일보 사설) ? 글쎄..
2. 개화기의 언론 ∥(1898~1910)
언론인 이승만 : 이승만은 20대 초반 뛰어난 언론인으로 '협송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주필을 두루 역임
황성신문 : 독립신문보다는 보수적.
러일전쟁 발발(1904)
포츠머스조약체결(1905)
카츠라 태프트 밀약 :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
2차영일동맹
: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주고, 일본도 영국의 인도, 버마 지배 인정
대한매일신보(1904) : 영국 특파원 베델 사장, 박은실 주필, 논설의 신채호. 한일합방 후에 매일신보로 바꾸고 경성일보와 더불어 황국신민화를 옹호하고 조선 인민을 노예화함.
이토의 말 : "수백 마디 말보다도 한 줄의 신문기사가 한국인들에게 더 큰 위력을 갖는다"
신민회(1907) : 일제의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비밀단체 형태의 정치 사회 운동이 전개
안중근 의거 →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3. 일제하의 언론(1910-1945)
언론의 암흑기 : 1910-1919.3.1
3.1운동 :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
문화통치로 전환(1919)
총독부 3개 신문만 허가(1920)
: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동아일보 허가한 일제의 속셈 - 그런 인물을 한자리에 모음
마지막 국왕, 순종 서거(1926)
신문사 간 기생관광행태(1934) - 광고수주 위해
손기정 사진, 일장기 말소사건(1936)
4. 미 군정하의 언론(1945-1948)
성조기 : 미군정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림. 태극기가 아님
미군정 우파신문 적극권장 : 조선일보 혜택
5. 이승만 정권하의 언론(1948-1960)
GOOK : 6.25 당시 미군은 한국인을 경멸하여 GOOK 이라 부름
특파원 케이스 비치 : "지금은 한국인으로 태어날 때가 아니다. 양키들이 한국인들을 눈에 띄는 대로 쏘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인 미국은 어떤 한국인이든 쏴 죽일 태세였다"
애드먼드 먼로 : "미군들이 한국의 계곡과 마을을 휘젓고 다니면서 퇴각할 때에 불을 지르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부산정치파동(1952)
: 이승만 정권이 간접선거제를 직접선거제로 바꿈. 이미 정치생명을 다한 이승만이 정치를 모르는 국민에게 표를 구하기 위해서.
한국일보 창간(1954) : 공식적으로 상업주의 표방
사사오입(1954)
: 3선 대통령이 되기 위해 헌법개정 시도
신문통합 정비(1954)
좌익지는 소멸되고 우익지만 남은 상태에서 여당지, 야당지로 구분됨.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언론에 대한 탄압은 있었을지언정 언론이 권력에 포섭당해 국민을 속이는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
6. 장면 정권하의 언론(1960~1961)
신문망국론 :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많은 신문사가 만들어지고, '신문 망국론'이 대두 됨
민족일보 :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의 슬로건으로 1961년 2월 13일 창간
7.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I (1961~1967)
5.16혁명 :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 일으킴. 박정희는 사상적으로도 의심이 받을 만한 과거를 지님. 남로당 사건도 그렇지만, 5.16 쿠데타 직후 북한이 박정희 주도의 쿠데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님. 5월 16일 오후 7시 평양방송.
"북한은 박정희의 과거를 알고서 그를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박정희는 자신이 사상적으로 의심 받기에 충분한 과거를 가졌다는 것을 상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무자비한 매카시즘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사이비 언론 및 언론 기관 정화
: 5월 23일 많은 언론사 폐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박정희의 사상적 콤플렉스가 주요원인 대두. 조용수 일족의 전재산 몰수. 독립군을 추적하던 오카모토 다운 처세로 평가
기자회견 (1962년 4월) : "자율적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부패 언론인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협박. - 부패척결의지야 백번 환영할 일이지만, 오히려 부패는 봐주고 비판만 봉쇄함.
새로운 언론정책(1962년 6월) 수립
"군사 정권에 있어 언론은 '혁명'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계엄령 해지(1962년 12월 6일) : 언론사전검열 해지,공화당 창당
2.27 선언(1963) : 박정희의 대통령 불출마선언-사람들 엄청 감동
3.16 군정 연장(1963) : 4년간 연장. 언론의 자유 상실
정경유착 :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경제개발 매진의 결과로 후일 한국 정경유착이라는 망국병을 안겨 줌.
3분 폭리 사건(1964) : 1월 15일 야당 원내교섭단체였던 신민회 소속의 국회의원이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 3분 관련 기업의 가격조작과 세금 포탈 고발. 이를 묵인해 주는 대가로 공화당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 받은 사건. 여기에 삼성그룹의 제일제당 연루.
인혁당 사건(1964) : 8월 14일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이 한 건 올리기 위해 철저히 조작한 건.
중앙일보 창간(1965) : 삼성재벌에 의해
사카린 밀수 사건(1966) : 삼성그룹이 한국비료공장 건설 자재로 몰래 들여와 시판하려던 것. 김두한의 오물 투척 사건도 여기서 발단. 이병철회장이 한비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함으로 일단락됨.
8.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II (1967~1972)
총선 (1967) : 3선을 위한 개헌을 위해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정선거로 개헌 가능선인 2/3 의석 확보.
통일혁명당 사건(1968)
: 8월 24일. 158명 검거 50명 구속. 신영복도 여기서 중형
신동아 사건(1968) : 『신동아』12월 호 <차관> 심층보도
사상계 탄압 : 반품을 통해 『사상계』의 경영 상태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과 세무사찰. 장준하 구속.
선데이서울(1968) : 언론의 그러한 상업성 추구는 박 정권이 바라는 바. 박 정권은 언론에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오직 상업적 성장에 몰두하게 유도하였다.
조선일보 코리아나 호텔 건축(1968) : 박 정권의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 호텔을 일본의 4천만 불의 상업 차관을 들여 지음. 당시 차관 도입은 엄청난 특혜. 1969년 10월 조선일보는 은혜에 보답코저 3선 개헌을 위한 캠페인을 벌임. 각계인사 초청 개헌 지지 찬양 아첨 보도.
MBC개국(1969) : 한국 영화가 내리막 길 된 때랑 겹침.
새마을 운동(1970) : 서울시 통반장 1만 8천명을 해임하고, 자기 사람으로 갈아치움. 영구집권을 위한 기초 다지기였다.
와우아파트 붕괴(1970) : 개발독재의 어두운 면, 날림 공사의 표본. 7월7일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드라마틱한 사례.
씨알의 소리 창간(1970)
: 4월 함석헌 선생, 장준하 선생이 창간
전태일 분신 사건(1970) :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 이후 1971년 노동 분규는 1656건으로 전년도 10배가 됨. 이 사건으로 『사상계』폐간.
언론자유수호선언(1971) : 3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항의에 힘입어 동아일보 기자단에서 선언. 이후 다른 신문사도 시도. 조선일보는 눈치봐 가며 윗선에서 시킨 것으로 됨.
대통령 선거(1971) : 박정희 3선 됨. 국가예산의 1할을 사용. 김대중의 막강한 포스를 겨우 94만표로 누름. 박정권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10.2항명(1971)
: 박정희 끄나풀 오치성을 국회의원들이 헤임한 사건을 필두로 가해 국회의원을 고문한 사건.
무기 휴업령(1971)
: 학교 개학 후 학생들의 저항 때문.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 선언. 이후 언론은 완전히 암흑기에 접어듦.
프레스카드(1972) : 카드 없이는 취재 못하도록. 언론 통제 수단인 동시에 신문사 경영합리화를 위한 수단이 됨.
권언유착 : 박 정권의 언론 특혜는 권언유착을 낳았다.
9.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 III (1972~1979)
남북7.4 공동선언(1972) :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발표. 통일의 대원칙으로서 자주, 평화, 단결을 내건 공동선언.
10월 유신(1972) : 국해를 강제 해산. 비상계엄 선포. 철권통치 체제로 전환. 언론은 사전 검열. 대학은 문을 닫음. 10월 27일 대통령 종신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 개정한 발표. 11월 21일 공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로 91.9%의 투표율과 찬성률 91.5% 로 유신시대 개막
언론은 유신 헌법의 홍보에 적극 협조.
조선일보 찬양 : 11월 23일 <새 역사의 출범> "그 어느 때보다도 압도적인 지지와 찬성을 나타냈다...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의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뛰어난 영도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성원의 발현"
비상계엄령 해제(1972) : 12월 13일
언론인들의 정관계 진출 : 출세의 본보기로써, 언론인의 정치화에 기여 (36.4%)
김대중 납치사건(1973)
서울대 유신철폐 시위(1973) : 10월. 최초시위
긴급초치 1.2호 발동(1974)
긴급조치 4호 발동 :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선언문 발표(민청학련 사건)의 결의문 발표후 발동
고문 : 우리 독립 투사들을 상대로 일제가 저질렀던 모든 잔학한 고문이 박 정권하에서 총동원 되었는데 그 주범은 물론 일본군 장료 출신 박정희였다. 대통령의 인권의식으로 말미암아 말단 수사관들은 대통령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모두 고문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절.
상류층 여성들 밀수사건(1974) : 국가 안보의 미명하에 은폐.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
언론탄압 : 박 정권과 언론사 사주들은 자유언론 실천 운동을 원천 봉쇄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으며 하루아침에 거리로 좇겨난 기자들은 오랜 기간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언론인의 전문성을 저해하는 이상한 문화로 고착되었다. 또한 이들은 언론사간 이동을 원천봉쇄하여 수준의 하향 평준화와 언론 정신의 쇠락을 초래하였다.
긴급조치 9호 발동
: 수만은 사람들 체포, 투옥 → 1979년 10.26 사태까지 단 한 번도 언론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명동사건(1976) : 3.1 구국선언.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등등 정치가와 종교지도자
민권일지사건(1978) : 언론의 참담함을 드러낸 사건
YH무역 사건(1979) : 180여명의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항의 농성 중 김경숙이 사망. 이에 박 정권은 김영삼을 제명한 사건. 10월 16일부터 부산과 마산에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남.
박정희 시해(1979)
: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청화대의 TV와 궁정동 안가는 그런 용도였단 말인가!" 후일 조선일보는 박정희를 미화하고 예찬하면서 박정희가 청교도식의 청렴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였다는 식으로 사기를 쳐 대게 되니 진정한 박정희의 재평가를 위해서라도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일은 클린턴 섹스스캔들 이상으로 낱낱이 파헤쳐 공개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10. 전두환 정권하의 언론 (1979~1987)
신군부 쿠데타(1979) : 전두환 신군부는 12.12 쿠데타를 일으킴.
광주민주항쟁(1980) : 5월17일 비상계엄을 확대 조치하고 김대중을 비롯 민주화 인사를 체포. 5.18 학살.
K공작 : 정권 장악 기도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반대 여론을 차단하기 위해 언론계 중진들과 개별 접촉을 통해 언론을 조정, 통제함
조선일보의 활약
: 신군부를 지지하는 기회주의적 변신에 성공. 신군부 지지발언. 5월31일 신군부 찬양에 가속도
고문으로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자율정화 결의(1980) : 언론사 통폐합
최규하 도중하차(1980) : 8월27일
KAL기 실종 뉴스(1983) : 전두화을 먼저 소개할지, 긴급뉴스를 먼저 다룰지 고민
평화의 댐 : TV로 앵벌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1987)
: 6.10 항쟁, 6.26 선언-대통령 직선제
프레스카드 폐지(1987)
호남 차별 : 신군부는 단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언론인을 해직시켰으며, 신군부와의 밀월을 원했던 언론사는 스스로 호남 출신 언론인을 박대하고 영남 출신 언론인을 우대했다.
11. 노태우 정권하의 언론 (1987~1993)
KAL기 폭파사건 : 선거 18일전에 KAL 폭파서건으로 노태우 당선에 큰 기여.
한겨례신문 창간(1988)
청문회 : 12월 12,13일 2차 청문회를 통해 언론 청문회는 신군부에 의한 1980년의 언론 학살과 5공 언론 탄압 및 통제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일정 성과를 거우었으나 언론 개혁으로까지 나아가는 데는 실패. 왜냐하면 이미 언론은 타압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권력과 더불어 수구 기득권 세력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는 걸 의미.
3당합당 : '민주투사' 김영삼은 야권 내에서 김대중의 그늘에 가리게 되자 대통령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손을 잡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변절을 저지름.
언론의 재벌 소유 증가
: 경향신문(한국화약), 국제신문(롯데), 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 대우), 내외경제신문; 코리아 헤럴드(대농), 영남신문(갑을), 문화일보(현대)
SBS 개국 (1991)
12. 김영삼 정권하의 언론 (1993~1998)
김현철의 월권
조선일보는 밤의 대통령
13. 맺는말 : 김대중 정권과 언론
1997 대선 : 언권 선거. 언론의 장난
언론에 대응 못한 순진한 김대중 대통령
언론개혁시민연대 공식 출범(1998)
'READING > 정치·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리뷰] 후불제 민주주의 (0) | 2009.07.01 |
---|---|
[북리뷰] 한국문학의 위선 과 기만 (0) | 2009.06.20 |
[북리뷰] 참여사회 2007년 9월호 통권 130호 (0) | 2009.06.18 |
[북리뷰] 녹색평론 77호 - 왜 미국은 전쟁을 필요로하는가 (0) | 2009.06.14 |
[북리뷰] 나의 정치학 사전 (0) | 2007.10.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