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7년 9월호 통권 130호
고향이라는 주제로 여러편 소개되는 에세이들 속에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1950년대가 전쟁 난민의 시대였다면, 1960~70년대는 개발난민의 시대였다. 이 사회가 각박한 난민사회가 된 것은 무엇보다 개발 독재의 구조적 유산이다. (15, 홍성태 상지대 교수) 난민은 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였던 것이다. 현대에 있어 고향은 예전의 그 고향이 아닌 것이다.
공정무역이라는 생소한 소재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소개하며 들어가는 말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유니세프의 빈곤에 대한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에서 1일 1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는 인구가 12억이고 이 중 농민이 9억이다. 8억 4천만 명이 영양실조이고 매년 6천만 명의 유아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다. 10억 명이 문자를 읽을 수 없으며, 이 중 80%가 개발 도상국에 살고 있다. (22, 최재숙 에코생협 상무이사)
내가 함부로 소비하는 그 돈은 누군가의 생명이 연명할 수 있는, 실제적 소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먼 타국 네팔과 같은 실업율이 높은 나라와 연대함으로써 생필품을 조달하고, 그들의 생계에 책임짊으로써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다른 장에서는 테러가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볼 수 있었다. "하마스의 저항을 '테러'라 일컫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테러'에 맞선 '테러의 균형'이다"(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테러는 선제공격을 당한 이들의 대응으로 접근해야한다는 것. 그렇다면, 누가 선제공격을 했단 말인가? 다름 아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들이 아닐까?
'테러와의 전쟁'은 전 세계 반미 저항세력들을 상대로 벌이는 21세기의 새로운 무한전쟁이다. ... 미국의 석유자원 챙기기,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 더 나아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힘으로 지배하겠다는 패권전략을 비판하는 물리적 저항이 곧 테러다. (31, 김재명 국제분쟁전문기자)
노엄 촘스키의 한숨섞인 한 마디를 더 붙인다면,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추구가 끝 모를 테러전쟁의 시대를 열고 말았다" (노엄촘스키)
<화려한 휴가>란 영화에 대한 소감문을 쓴 어떤 이의 글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에서 설명한 선재공격, 즉 국가테러의 한 형태에 대한 결과 인 것이리라.
<화려한 휴가>가 불편한 이유는 그 존재 자체이다.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조금도 치유되지 않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치유란, 적어도 책임을 묻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용서를 해야 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상업 영화가 화해를 구하고 치유되지 않은 역사를 신파로 몰아가는 감성적 포장이 그렇다는 말이다.(54, 이충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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