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0년대를 전후해 유럽대륙에서 '악마의 하수인'이라고 불리우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흉폭한 범죄를 저질러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사상적 자유를 외친 자체만으로도 그 주장의 파급력에 긴장한 나머지, 기성 위정자들이 부여한 낙인이었다.
5살 되었을 무렵부터 네델란드 유대인 회당(시나고그)에서 랍비 후계자로 지목될 만큼 언어적 재능을 보인 아이였다. 유대 공동체의 후원으로 교육이 강화될 만큼 전도유망한 아이였건만, 늘 <히브리 성경>의 인격신에 대한 회의를 가지며,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재산도 여동생에게 모두 물려줬다. 그가 유대 공동체를 떠나려 할 때, 공동체는 머물러주기를 간청했다. 연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타협도 해왔다. 끝내 암살시도도 있었다. 그는 유대교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생계를 위해 배웠던 렌즈 세공 기술로 조용히 철학을 하며 살고자 하였을 뿐인데, 유대교의 배교자에 대한 의식은 잔혹했다. 마당에서 모든 공동체 일원들로부터 짓밟혔다. 그들 중엔 여동생부부도 있었다. 회중 한 가운데서 가히 입에도 담기 힘든 온갖 저주를 한 몸에 받았다. 1미터도 그에게 다가가서는 안되고, 말을 걸어서도, 서신을 주고받아서도 안되는 내용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추방한 이웃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지 않았다. 놀라운 정신력과 차분함의 소유자였다. 데카르트를 존경했으나, 그의 신존재증명에 실망한 나머지, 그를 뛰어넘는, 충격적 문제작 <신학 정치 논고>를 1670년에 익명으로 출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책이 누구의 글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이제는 유럽 전역으로부터 온갖 저주를 들어야 했다. 그에 대한 비난은 당대 학풍적 유행이 되었다.
라틴어로 발표된 이 책은, 로마시대의 문인이 쓴 것처럼 자유자재로 다뤄져서 '라틴어 문학의 마지막 걸작'이라는 찬사를 얻기까지 했다. 그리고 차츰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신을 인격신이 아닌 범신론의 신으로 묘사한다. 모든 사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 남몰래 지지자들이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려하였으나 번번히 거절했다. 허름한 여관집에 머물며 렌즈세공을 계속했다. 독일의 한 대학에서는 교수로 청빙해 왔다. 기독교에 대한 선은 넘지 말아 달라는 단서와 함께. 그는 달콤한 제안을 거절했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네델란드로 침공했을 때에도, 프랑스 왕은 이 청년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네델란드의 모든 기대를 모아 왕 앞에 불려갔다. 왕의 요청은 간단했다. 다음 책을 낼 때에는 자신의 이름을 서문에 넣어달라는 것. 역시 거절했다. 네델란드는 그를 원망했다.
낮의 노동과 야간 집필을 계속하며 1674년 필생의 대작 <에티카>를 완성한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출간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신학 정치 논고>는 금서가 되었었다. 아무리 네델란드가 종교적 자유에 관대했다지만, 그 범위는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 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체 세계관을 뒤집는 것이었기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1676년 생을 마감한 이후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출간된 <에티카>는 자유로운 시민은 국가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라는 사상을 남겨준다. 현대 국가관의 완성이자 근대 서양 시민 윤리의 근간이 된다. 이 사람이 스피노자다.
이런 위대한 사상이 당대 개신교 아래에서는 나올 수 없던 것인지 아쉬운 대목이다. 모두 왕정과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하는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감당할만한 고난을 내세에서 모두 상급 받는 수순으로 봉합하여 시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던 것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자 동굴이었다면, 그 동굴을 뛰쳐 나와 현대 국가의 근간을 만든 이 사상가가 비록 짧은 생이나마 너무 힘겹게 싸워야 했고, 흔들림없는 신념으로 달콤한 호의를 거절해 가며 지켜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우리는 모두 그의 사상의 수혜자들이며, 아무리 개신교가 평화와 평등의 종교를 외친다 한들 그의 사상적 조명 없이 현재와 같지는 않았을 거란 점에서 인류는 큰 빚을 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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