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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ING/독서 단상

니체의 사도바울 비판

by 체리그루브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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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에서야 바울이 만든 기독교에 회의를 갖기 시작헸는데, 이미 100년도 전에 현대신학의 도움 없이도 능히 사도 바울을 향해 비판을 아끼지 않은 철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그의 주장을 옮겨 보려고 한다.

원래는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라는 그의 마지막 저서를 읽어야 하는데, 우연히 잘 요약한 유투브를 보며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생뚱맞게도 그 해설자는, 저자 니체가 바울에게 열등감이 있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그가 니체를 읽고도 그렇게 밖에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실컷 읽어 놓고도 다른 결론이라니 말이다.

니체가 주장한 "힘의 의지"는, 우리가 힘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단다.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고, 이를 꿈꾸며, 신분 상승의 의지도 가져보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란 것이다. 현실에 안주 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명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이런 혁명적인 인간들을 봐왔고 그들을 "초인"이라 불렀다. 초인은 독일어로 위버멘쉬인데, 영어로는 슈퍼맨이다.

니체가 본 예수는 가히 혁명적이었고, 초인으로 인정할만한 존재였다. 그것은 어쩌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의 정치적 죽음이 시사하는 바이기도했다. 당시 예수의 죽음을 두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저마다 이유를 찾았다. 그중 특출난 제자(어떻게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제자도 제자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인 사도 바울의 주장이 가장 보편적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바울신학의 채택설은 현대신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전혀 손색이없는 주장이다. 여기에 나의 생각을 보태자면, 바울의 주장과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가 어울려 오늘날까지 서구의 중심 사상으로 흘러왔다고 보는 것이다.

니체가 하려고 했던 사도 바울에 대한 비판이 이 지점인데, '예수 삶' 자체에 주목하려 든 게 아니라, 바울이 세운 '종교적 신화'에만 머무르게 하면서 인류를 나약한 허무주의에 빠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서구는 역사 속에서 위버멘쉬를 만났었고 그럴 때마다 위정자들은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속에 불타는 상승의욕을 제지하지 않는 한 세상은 혼돈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로써 이를 통제하려 하였고, 위버멘쉬와 정 반대인 '나약한 인간'을 육성해 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점이 기독교가 서구에서 백성들을 다스리기에 수월했을 것이란 게, 앞서말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 부분이지 않을까 한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소개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이런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면, 순종적이고 노예적 도덕을 강요하는 바울의 주장은 국가 권력에 대해 '신도 인정한 것'이란 주장으로 정당성을 부여했다. 뿐만아니라 종말적 신앙을 통해 현세에서 어떤 혁명도 추구할 필요 없이 오직 내세의 영원만을 위해 현세의 고통도 능히 감당하는 자세를 갖게 할 뿐이었다. 예전에 베스트 신앙서적이었던 <내려놓음> 같은 책들이 이런 류라고 할 수 있겠는데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하겠다. (사실, 대부부의 기독교 신앙 서적은 대동소이하다)

이렇게 기독교는 약함의 미덕을 추구하고, 현세에 대한 허무주의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고, 사랑, 봉사, 희생 등을 요구하였다. 이런 미덕들은 약자가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강자를 악인으로 전략시키고 자발적 가난을 큰 신앙으로 추대하는 분위기를 나았다. 즉, 인간 본연의 '힘의 의지'를 축소 왜곡하였고, 노예도덕에 익숙하도록 학습한 꼴이 된것이다. 대체 바울이 뭐간데 인류를 이다지도 기괴하게 만들어 놓았는가 싶다.

이제 우리가 바울의 기독교를 받들어 모실 이유가 있을까? 제도교회의 목사들은 이 믿겨지지 않는 바울의 신학을, 십자가와 부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로 교인들을 묶어두고 싶어하고 각종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으로 교인들 삶을 위협하며 부부관계의 깊은 부분까지 간섭하려 한다. 대체 왜? 당신들이 신의 대리자라도 된다는 것일까? 저들은 제2, 제3의 바울이 아니라고 어찌 주장하지 못할까? 바울이 누군가? 까막눈 제자들이 3년동안 예수를 따라 다닌 것 보다, 환상을 통해 만난 예수를 내세우며, 저들의 주장을 일축하거나 발 아래 두려한 독선적인 무당이 아닌가 하는 거다. 내가 무당이라고 한 게 과하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그의 서신에는 신비주의로 가득한 이야기들 뿐이다. 성찬식을 통해 비밀의 성례를 하는 것이며, 하늘에 몇 번을 갔다 왔다느니 하는, 접신하는 것과 같은 광경들 말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기리며 '살과 피'를 논하니, 초기 로마인들은 저들을 인신공양 종교로까지 오해했다지 않은가? 바울은 인간 예수를 신의 반열에 올려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제1 제자라 자청했다.

오늘날 성서 자체에 대한 연구가 거듭되면서 비로소 복음서 등이 모두 바울을 추종하는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던 니체도 이미 100년 전에 이러한 간괴를 간파했더랬다. 서구 전체가 나약하게 미쳐 돌아간 것을 그는 예리한 관점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쾌락을 향유할 권리를 앗아갔고, 반대로 삶에 고통을 부과해야 한다는 역설을 펼치면서 그저 신의 선물과 은총만을 구하도록 가르쳤다.

니체는 기독교의 윤리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했다. 친구뿐만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한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연극적 기지를 발휘하여 고통을 이겨낼 힘을, 마치 고통이 없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행동하도록 했다. 투쟁을 하여 이겨내도록 한 게 아니라,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기제를 사용하게 한 것이다. 바울은 죽음이후의 삶을 약속했다. 다시 말해 현재에서는 약속한 게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기독교가 서구역사의 최대 불행이라 했다. 부자와 강자에 대한 혐오를 만들고, 믿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진리를 향하는 금단의 길을 만들었고, 행복보다는 희망, 미래에 대한 소망. 희망고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리하여 바울의 기독교를 "피는 진리의 증거로써 최악이다."라고 비판했다.

니체는 철저한 회의를 강조한다. 끊임없는 증오가 아니라 회의하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는 자가 되라고 한다. 모든 확신으로부터 해방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절대적 진리를 깨고, 상대성을 획득하라는 것.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정열, 욕망, 힘을 가지면서 위버멘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그런 연유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저술했고, 바울이 육성해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그 반대인 초인을 설파한다. 누구나 될 수 있다고. 기독교는 바울의 인위적 작품이자 허황된 종교다. 니체가 <짜.투.>통해 증명해 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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