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로드리게스 신부는 존경하는 스승님이 일본 선교지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확인코자 친구와 함께 일본에 잠입한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높았기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자신들을 숨겨주다가 순교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발각되었으나 굴하지 않았다. 함께 투옥된 교인들은 모두 배교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나, 막부 이노우에 현감은 또다른 성도들의 목숨을 담보로 배교하도록 협박했다. 결국 무릎을 꿇었다.
영화 <사일런스>는 엔또 슈사쿠의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속에서, 마지막 선교사 로드리게스 신부의 배교과정을 다루고 있다. 일본의 배교 요구는 단 일 회에 그친 건 아니었다. 감시의 나날이 계속됐다.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곳의 신앙을 어쩌지는 못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을 저술하도록 종용을 받아 그 장단에 맞춰준대도, 시마다 때마다 예수 얼굴을 밟는 의식(형식)을 한대도 그는 죽는 날까지 신앙을 간직했고, 그 본질에 관한 영역은 그 어떤 형식으로도 훼손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따지고 보자면, 원해서 배교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죽어야했던 다섯신도를 살리고자 배교했다. '나의 신념과 신앙을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신도들이 죽어야 할 것인가?'하고 내외적으로 압박받았다. 상황을 타개해 줄 하나님의 구원은 없었다. 다만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떠올랐다. 배교의 수치와 비난을 감내하며 평생 오해받고 살아야 할 처지이지만, 타인의 생명을 져버릴 수 없었던 결정 만큼은 예수의 희생과 닮은 것이었다.
슈사쿠의 다른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예수가 잡히시던 날 밤. 모든 제자들은 제쳐둔채 예수만 처형당하는 게 가능한 일이었겠느냐고. 그 처형의 의미에는 제자들의 생명과 거래된 정황이 보이는 부분이라고 했다. 바로 예수와 공의회 간의 거래가 있었다는 합리적인 추론이다. 모든 댓가를 예수 홀로 짊어지겠다는 적극적 의지와 제자들의 배신이 맞물린 헤프닝이었지만, 사실상 그후 제자들의 회심(깨달음)에 이은 질문과 답변들에서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예수라는 의미를 찾은 것이 아닐까?
신은 왜 오늘날에도 침묵하실까? 세상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아파하는데 신은 어디에 있을까? 혹시 없던 건 아닐까? 우리가 아는 그런 신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회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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