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와나미 문고 시리즈 23번째 책이다. 이와나미 문고는 1913년 이와마니쇼텐을 창업한 이와나미 시게오(1881~1946)가 자신이 학생 시절 애독했던 독일의 '레클람 문고'를 본따 창간했다고 한다. 휴대하기 쉽도록 A6 크기로 만든 책자로 6000여권의 고전을 번역하여 출간한 일본의 대표적인 인문 출판사다.
<지적 생산의 기술>라는 제목과는 살짝 다르게, 내용은 요즘의 기술을 반영하지 못한 듯 하다. 저작연대가 조금 의심드는데, 70년대가 아닌가 싶고, 일정부분 개정한 흔적이 있긴한데, 여전히 21세기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메모하고, 카드 만들고, 타이프라이터 쓰실 분에게 이책을 추천 드리고 싶다.
저자는 생태학자로써 많은 메모를 일정 서식에 따라 보관하는 방법의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의 스마트폰의 카메라와 메모, 일정 기능에 비해 얼마나 효율적일 수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물론 예전에 3P바인더를 사서 한동안 열심히 쓴적이 있다. A5사이즈로 기성 수첩보다는 조금 크지만, 시간과 목표관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첩이라 해서 수년간 써왔다. 덕분에 많은 인쇄물을 A5 사이즈로 출력하여, 서브바인더에 넣어 보관해 두고 있다. 지금은 거의 볼 일이 없다는 게 함정. 이제 몇몇 밑줄친 문자을 보도록 하자.
나 역시 그런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사상은 정신의 문맥이다. 카드에 뿔뿔이 적어놓았다고 나중에 거대한 줄기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카드로 지식을 정리한다는 기술은 천박한 능률주의자의 발상이며, 적어도 사상가가 할 짓은 아니다. 이런 의견에도 동감한다. 카드에 대한 불신은 컴퓨터에 대한 불신과 비슷하다. 능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인간 정신의 고급스런 업적이 능률만으로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인간의 문제가 능률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반감이다. (90)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학자의 의견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야 겠다. 누군가가 메모로써의 파편적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고 반박했던 것인데, 이에 대한 반론인 셈. 그런데 애꿎은 컴퓨터 타박이으로 결론 난 꼴이 우습다. 어쨌든, "사상은 정신의 문맥"이라는 멋진 글귀를 건진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책은 쌓아올려서는 안 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책과 서류는 절대로 쌓아놓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세로로 세워놓아야 한다. 생각보다 간단하지만 이 원칙을 실행하는 것이 정리의 전제 조건이다. (118)
곤조가 있는 어르신이다. 집에 가면 얼른 뉘인 책들을 모두 일으켜 세워야 겠다.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도구가 지적 생산의 원천은 아니다. 문제는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발상이다. 또 전체적인 사용 체계가 세분화되지 않으면 사람마다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에도 차이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구입한 도구를 100퍼센트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134)
나도 3P바이더를 좀더 잘 사용하기 위해 20공 펀치를 구입해 둔 적이 있다. 한 때 잘 썼더랬다. 그거 프린트 한다고 SAMSUNG 레이저 프린트도 구입했더랬는데, 요즘엔 딸래미 숙제 때나 가끔 켠다. 도구는 지적 생산의 원천은 아니다.
처음에는 밑줄 친 부분을 노트로 옮길 시간이 없어서 다 읽은 책을 책상에 놔뒀을 뿐인데, 이런 습관이 생기고 보니 지적 생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읽은 직후보다 책에 대한 인상이 엷어져 책 내용에 훨씬 냉정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서도 밑줄 친 부분 중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만 노트하게 된다. (154)
이 부분에 공감한다. 요즘엔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부르지만, 저자에게는 경험적으로 얻게 된 기술인 셈이다. 가끔 책을 읽고, 후기를 써버리는 일련의 행동을 마치는 순간. 나의 기억은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감하면서 읽었던 것을 한 순간에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은채로 종결시키지 않고 놔두었을 때, 그 기억이 오래 남고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이 자이가르닉 효과다.
흔히 책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책읽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비판거리를 찾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비판하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럴 바에야 뭐하러 책을 읽나, 라는 생각마저 든다. 비판하기보다는 감탄하면서 읽는 편이 자신에게 훨씬 유리하다. 대신 감탄을 하되 저자의 생각만 따라가면서 감탄할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의도대로 내게 맞는 대목을 찾아가며 읽는다. 저자가 대수롭지 않게 쓴 한 줄의 문장이 시발점이 되어 나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발견을 이룩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156~157)
이 분이 어르신이라는 점이 계속 떠올려지게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공격적 책읽기>라는 책을 접하면서 분별력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모든 가치체계에 저항하기를 꿈꿨다. 주례사식 서평은 문학동네에서나 하는 그 동네 잔칫글로 한정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면, 그렇게 날서게 읽을 필요는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읽은 <부족한 기독교>는 비판적 책읽기의 열매란 것이 이것이구나 싶게 한다. 역시나 독서의 결과는 그같은 분별력을 기르게 하는 힘을 갖추게 하는 것이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나를 위한 업무 보고라고 생각한다면 일기에 대해 여러가지를 연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하루 겪었던 일들 중 이것만은 꼭 기록해둬야 한다는 항목을 미리 정해놓을 수도 이고, 아예 서식으로 만들어서 파인더로 보관할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서식을 일기 용지처럼 대량으로 인쇄하고 필요한 내용을 적당히 기입하면 그날의 일기가 만들어진다. 이런 시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일기가 반드시 문학적일 필요는 없다. (211)
굉장히 실용적인 제안이다. 일기에 대한 개인 업무보고라면, 정말 쓰고 싶지 않은게 함정인데 말이다.
그래서 지적 생산의 기술이 어찌됐다는 것인가? 역자의 후기를 봤다. "지적 생산은 소수 지식계급의 노동과는 다르다. 노동이 사회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 1차 목적이라고 한다면 이 책이 추구하는 지적 생산은 개인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어찌 보면 지적 생산의 매체가 혁명적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열렬한 호응과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감탄하게 된다" (271) 누가 그렇게 호응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이 책이 꽤나 오래전에 출간된 것임은 확인 할 수 있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지적 생산의 기술은 메모, 카드, 발췌 규격화, 사무정리, 독서, 일기 등에까지 이어지는 소소한 원칙이었다. 일례로 시중의 기성노트를 사서 지식을 정리하기 보다는 개인이 디자인해서 한꺼번에 대량 인쇄 하고, 그 양식지를 사용하라는 것. 왜냐하면 시중의 노트는 수명이 짦고, 디자인이 제각각이라 통일성을 갖출 수 없다는 말씀. 이처럼 경험에 근거한 저자만의 독특한 지식 생산 기술은 일본의 대표적인 자기계발서들과 그 가벼움을 함께한다. <지적 생산의 기술> 제목 만큼은 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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