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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인문

[북리뷰]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by 체리그루브 201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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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재는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이다. 구조주의란 말을 고등학교 때 들었으니 꽤나 오래된 단어인데도 그것을 알고자, 책을 통해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학 학술제 때, 어떤 강사 분의 구조주의 강의를 듣고 아마 모두 알았겠거니 하며 더이상 흥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만, 지금에 와서 나는 왜 이렇게 열광하고 감탄하며 이 책을 붙잡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하면, 내가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방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결국 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인식의 틀 때문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좀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새로운 시각을 갖고 세상과 책을 바라보지 않았겠는가 하는 마음에 자책과 흥분이 이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이 그만큼 구조주의를 설명함에 있어 충분히 쉬웠고,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 기저를 닦았던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라는 만만치 않은 거인들의 핵심에 가까운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것이다. 결코 이들을 책 단권으로도 이해하기 조차 쉽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구조주의의 의의에 있어서 만큼은 이들의 사상적 위치가 어떠했는가라는 면에서는 이해하기 쉬웠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자신도 젊은날 구조주의를 알기 위해 무척 노력했으나, 너무 어려워 다가갈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사회인으로 인생을 한참 경험한 후에야 그것이 술술 읽혀지더라는 것이다. 왜일까? 나는 알 것같다. 그것은 구조주의를 둘러싼 많은 경험이 사회 경험치와 비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이라도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이웃과 부딪히지 않고, 텍스를 여러번 읽음으로 얻어지는 매번 새로운 경험을 겪지 않고, 유럽인들의 다른 것, 차별화 된 것을 찾는 독특한 성향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또는 고문서를 읽을 때에 자기를 버리고 당시로 들어가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독자라면 이 구조주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책을 읽으며 꼽아둔 몇몇 구절들이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p.27)

 

 

헤겔이 말하는 '자기의식'이란 한마디로 일단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떨어져 그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상상을 통해 마련된 전망 좋은 자리에서 땅 위의 자신과 주변의 사태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자의 시선을가지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지만 동물은 스스로의 시선에서 빠저나 올 수 없기 때문에 자기를 대상화해서 직관할 수가 없습니다. (p.33)

 

 

신체를 표적으로 하는 정치기술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단지 신체의 지배만은 아닙니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이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입니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닙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자기의 내발적인 욕망에 의해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등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p.113)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말한 영화의 예에서 보듯이 텍스트 쪽이 우리를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로 형성합니다. (p.136) - 흑인들이 같은 흑인을 노예선에서 무게를 맞추기위해 배에서 밀어낼 때 박수치는 장면에서

 

 

텍스트와 독자는 사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매우 충격이 강한 책의 경우 마지막까지 읽은 다음 성이 차지 않아 다시 읽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으면서 첫 번째 읽을 때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놓친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책을 한번 끝까지 읽은 덕분에 우리의 견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읽을 수 있는 주체'로 우리를 형성한 것은 텍스트를 읽는 경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p.137)

 

 

바르트는 성적인 비유를 사용해서 유럽적 해석의 폭력성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유럽 언어는 '욕정을 느끼는' 언어입니다. 대상을 벌거벗기고 모든 것을 노출시켜 의미로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말의 의미를 완전히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유럽적인 해석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하이쿠의 풍미에 이를 수는 없겠지요. 오히려 하이쿠는 해석을 자제할 때에만 그 참된 미적 가치가 열린다고 바르트는 말했습니다. (p.149)

 

 

라캉에 따르면 피분석자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말할 때의 시제는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말하는 단순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그때에 이미 완료한 행위를 나타내는 전미래형입니다.('나는 저녁까지는 일을 끝마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전미래의 사용 방법입니다).

내가 과거의 사건을 '생각해내는' 것은 지금 나의 회상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내가 이런 인간'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즉 타자에 의한 승인을 얻기 위해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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