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츠-베르너 쿠비차라는 독일 신학자는 <예수라는 망상>을 저술하여 예수가 어떻게 신이 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아직 국내에는 번역서가 발간 되지 않아 볼 수 없지만 (옥성호 작가의 <신의 변명>의 내용과 비슷), 인터뷰 기사를 보고 내용을 정리한다. 라이마누스 (1694~1768년)의 지난친 상상은 배제되었지만, 대체로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예수는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부른 적이 없고, 그 주장은 예수 사후, 즉 예수를 알지 못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한 것이란 것.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한 것은 결코 예수의 계획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부활은 전설로 시작되었다가 후대에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부분에서 엔또슈샤쿠의 이야기가 유효한 것 같다. 예수 잡히시던 밤, 예수 자신만 잡아가는 대신, 제자들은 풀어주는 것에 대한 협상이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은 예수에 대한 무거운 짐이, 인류에 대한 희생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아니었겠냐는 부분에서 설득력을 갖게 한다.
쿠비차 이야기로 다시 가보자. 예수의 신앙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과 거의 맞지 않았다고 본다. 예수는 유대 신앙을 갖고 그것을 설교한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설교한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동시대 유대교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초기엔 기독교도 유대교의 한 종파에 불과했었다. 그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중심 메세지는 오류로 가득찬 서사였고, 인류애적인 사랑을 설교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웃사랑은 실제로 실천도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성전청결사건의 광폭한 행동들에서나 제자들이 무기를 들고 다니도록 허용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수는 당시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로 보았지만 이는 오늘날 신자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신앙의 자세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왕에 붙이는 호칭이었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라 여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쿠비차는 예수의 부활사건은 마가복음 고대문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서술로서, 후대에 첨가된 내용일 것이라고 말한다. 되려 왜 3일만에 부활할 일을 두고 땀이 피가되도록 기도했겠는가를 반문한다. "신의 아들의 죽음이 겨우 3일 간 뿐이었다면, 그건 도대체 희생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수많은 부모님에게 있어서 만약 자기 아이가 집나갔다가 3일만에 돌아오면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요?"
쿠비차는 크리스마스 내러티브도 순전한 전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구유도 없고, 동방박사도없고, 인구조사도 없었고, 베들레헴 영아살해도 없었고, 이집트 피신도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상 모든 역사가가 동의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도 전혀 다뤄지지 않은 점을 들고 있고, 바울도 모르는 처녀 탄생 일화라고 일축한다. 어쩌면 이부분은 종교적인 영웅들이 어떻게 기적적으로 탄생했는지는 알고싶어 하는 신자들을 위해 고안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기존 유대교 환경에서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않은 듯 하다. 그저 임박한 신의 통치를 선포했을 뿐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가 비유대적 환경에서 토양을 쌓아가면서 유대적인 메시야 사상을 버려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둔갑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갈릴리 목수의 아들 출신에게는 말도 못할 수식이죠. 예수는 세계사적으로 가장 과대평가된 인물이 되었습니다."
쿠비차에 의하면 대다수 현대 신학 주류에 속하는 이론을 설명한 것일 뿐이며, 이보다 더 급진적인 것들은 오히려 교회 신앙인들에게 충격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미 충격임) 그럼에도 왜 대중에게 널리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 그가 서서히 신의 아들로써의 역할에 맞추어졌다는 것,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성경은 일차 자료 심지어 이차 자료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것, 마리아는 공의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 등. 이것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많은 것이 수많은 신약학자들의 책을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들과 교회들이, 만약 자신들의 공동체가 이러한 연구 결과를 알게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다른 사람들이 와서 결과적으로 교회, 목사, 대학교의 신학자의 특권을 끝장내거나 취소 시키려 하겠죠. 그러니 교회도, 목사도 신학 교수들도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쿠비차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한다.
"이데올로기와 종교에 대해서, 자신들이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항상 지니세요. 당신 스스로 생각하고, 교회라는 수례에 몸을 맡기지 말고, 신앙인의 무리에 휩쓸리지도 마세요. 모든 인간을 위한 단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당신을 설득하려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세요.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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