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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오리엔탈리즘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015)

by 체리그루브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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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이 서구사회에서 담론으로 거론된 것은, 1978년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책 출판 이후부터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지배하고 제국주의적 권위를 갖기 위한” 서양의 지배담론으로 규정하면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의 주장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이 동양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동양을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도의 총독을 지낸 커전은 이를 '지적 사치'가 아닌, 영원한 지배를 위한 '제국의 의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둘째, 동양의 타자 이미지를 설정함으로써, 서양의 자아 이미지를 정립하는 데 도움을 얻었다는 것이다. 서양이 자신의 부정적인 내면을 투사시켜 만들어낸 대조적 동양의 이미지는, 변화가 없고 정체적이고 획일적이며, 자기 스스로를 대변할 능력이 없는 열등한 타자였다는 것이다. 샤토브리앙 같은 프랑스 작가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아니라, '해방'이었다고 망언을 했단다.

셋째, 서구는 당시 아랍인들과 이슬람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설명하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서양이 이슬람 문화의 특성을 모두 알 지 못하면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성급하게 결론짓는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연구의 결과로 서양의 억압적이고 인종주의적인 태도가, 제국주의의 종식 이후에도 서양 담론의 여러 가지 층위 속에 남아있음에 주목하게 해준 것은 큰 성과다. 또한 동남아시아와 같이 우리보다 산업화나 경제적 발전이 늦은 아시아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도 은연중 복제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을 꼭 이런 부정적 시각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사실은 오리엔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가 만든 고유한 용어도 아니었다. 그의 '정의' 속에는 팔레스타인 출신 학자의 한계에서 오는, 이슬람의 피해의식과 범위의 문제가 남아 있다. 즉, 동양의 전 범위를 포괄하지 못하고 이슬람 문화에 한정 시킨 부분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에 중동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극동을 포함하는, 그리고 서구와의 교류에서 빚어낸 유럽의 감동(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을 정리하는 것이 이책의 존재 이유다.

본래 오리엔탈리즘을 설명할 것 같으면, 동양에 대해 일종의 구도적 동경심을 갖는 태도이며, 동양을 유토피아, 또는 이상국으로 생각했던 관념이며, 동양의 종교와 사상과 문화, 특히 동양의 정신적 가치와 그 산물에 대해서 흠모와 존경을 보이며, 그것을 배우고 받아들이고자하는 관념과 태도를 의미했다.

고대부터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오리엔트, 즉 동양은 지중해를 경계로 하여 그 동쪽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점차로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방세계라는 뜻이 부가되어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적대적 타자의식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고대에서부터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온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것은 민족이나 이데올로기적 차이보다 더 깊은 보다 근본적인 문화적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충돌의 원인이 된다고 섀뮤얼 헌팅턴은 주장으나 나는 그 주장에 크게 공감하지 않는 바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공은 동서양의 대화의 가장 극적인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장 실증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을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원정단에 여러 명의 철학자들을 대동하였는데, 그 중에는 회의주의의 창시자 피론(Pyrrho)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석가모니의 불교사상과 회의주의의 사상 간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발견된다. 그 둘은 양쪽 다 인간조건이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면서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흔들림이 없는 평정의 상태에 도달할 것을 지향한다.

기독교가 인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짐작을 가능하게 하는데, 실제로 19세기 중엽 이래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역사적 결합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 (실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예수의 사랑의 종교와 같은 이질적 사상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도 오랜 학계의 논란 대상이다.)

기원 초기에 인도로부터 서구로 사상의 전달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결코 허황된 사실만은 아니다. 아쇼카대왕의 선교사들이 서양에 파견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원정 또한 동서양의 사상에 상호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특히 기독교 원리의 초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영지주의는 불교와 힌두교 사상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이렇듯 고대에도 긴밀했던 동서양의 대화는 7세기에 이르러 이슬람의 서방 침략에 의해서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프란시스코회플라노 카피니윌리엄 루브록의 중국여행 그리고 더욱 유명하기로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과 함께 그것은 다시 재개되었다. 중세 기독교의 닫힌 세계관에 얼마간의 영향을 주긴 했지만 그러나 동서양의 어떤 실질적인 지적 접촉은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동양의 신비적이고 우화적인 땅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을 다시 한번 촉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새로운 관심과 탐구의 열정을 불붙이는 계기가 됐다.

중국 열풍

동양, 특히 중국과 서양과의 만남은 15-6세기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전 지구적인 탐험여행과 그 결과로 일어난 유럽의 정치 경제적 힘의 팽창과 함께 시작한다. 동양을 향한 유럽의 이러한 적극적이고 운명적인 팽창을 촉진시켰던 동기는 복합적이다. 르네상스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지적 개방성과 호기심에서부터 이슬람 세계를 우회하여 동양으로 가는 무역로를 찾고자 하는 필요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요인을 포함한다.

비록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충동이 그 근저에 깔려 있었다 하더라도, 서양이 동양의 마음을 열고 탐험하는 실제적인 사업이 시작된 것은 동양의 이방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고자하는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인 개종이 일차적 목적이기도 했지만, 최초의 오리엔탈리스트 학자들이었고 유교철학과 중국인의 세계관을 서양에 전한 최초의 서양인들이었다.

국외자인 그들이 토착 중국인들에게 이방의 교리나 실천을 부과하려고 하는 것보다 카톨릭 의식을 유교적 관습과 실천에 교묘하게 적용시킴으로써 바로 중국인의 마음과 영혼에 침투하려고 하였다. 이는 《천국의 열쇠》에서 프랜치스 치셤신부가 보인 모습이 떠오르게 하며, 제3세계 신학의 현지화 전략이었던 것을 언급하고 싶다.

예수회 회원들의 보고와 또 다른 여행자들의 보고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연구가 쌓이게 되고, 1736년 장-밥티스트 뒤 알드의 4권의 역사물, 「중국총사 The General History of China」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들 책에서는 유럽과 중국을 비교한 부분에서 유럽보다 오히려 중국을 높이 평가했다.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들 중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 중에는 몽테뉴(Montaigne), 말브랑슈(Malebranche), 라이프니츠(Leibniz), 볼테르(Voltaire), 몽테스키외(Montesquieu), 디드로(Diderot) 그리고 애덤 스미스(Adam Smith) 등이 있다. 이 시대 유럽에서는 유교 나라 중국이 관심의 주된 대상이 되었고, 공자는 거의 숭배의 경지에 이르러 “계몽주의의 수호성인”으로까지 여겨졌다.

계몽주의시대 중국에 대한 열풍이 유럽에 널리 퍼지긴 했지만, 그것도 18세기 말엽이 되면 점차 소진되기 시작한다. 18세기 중엽에 폼페이 유적의 발굴에 이어 일어난 헬레니즘의 부흥이 중국열풍의 소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1770년에 중국으로부터 기독교 선교사들이 추방된 사건도 이에 가세했지만, 중국을 유럽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더 큰 이유는 중국의 이미지가 유럽의 중국애호가들에 의해 다소 과장되었고, 중국의 지혜와 정치 경제적 제도, 도덕철학 그리고 종교적 관습까지도 실제보다 더 과장되었다고 하는 의심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반-중국의 목소리는 루소에게서 나왔다. "그들 [중국인들]이 쉽게 빠지지 않는 죄는 없고, 그들 가운데 흔하지 않은 범죄는 없다"고 선언했다. 콩도르세(Condorcet) 또한 자유가 결핍된 중국을 정치적 도덕적 진보에 장해물로 보았다. 그리하여 오리엔탈리스트의 새로운 열정은 중국에서 인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인도와 낭만주의자들

중국이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낭만주의자들의 마음과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특히 인도였다. 인도의 신화와 만연한 다신사상과 무절제한 제식은 계몽사상가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었지만, 인도문학과 사상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관심과 열광은 19세기 초 독일의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널리 유포되었는데, 레이몽 슈왑(Raymond Schwab)은 이를 ‘오리엔탈 르네상스’라고 명명했다.

오리엔탈 르네상스는 18세기 후반 무굴제국이 몰락하고 그 결과 인도대륙이 영국과 불란서의 정치적, 상업적 관심에 노출되고,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문헌들이 유럽 학자들에 의해 대거 번역되고 연구됨으로써 촉진되었다. 인도사상은 기존의 유대-기독교 전통 사회에 대한 높은 환멸감의 분출구 역할을 했다. 낭만주의자에게는 인도가 마치 약속의 땅과 같았다. 거기에는 잃어버렸다고 느꼈던 인류와 자연에 대한 일체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당대 서구 세계에서 분리되어버린 종교와 철학과 예술의 재통일을 위한 열망이 있었다.

인도사상은 그 시대의 유럽 지식인들의 마음 속에 유물론적 서양과는 대조적으로 고양된 정신성의 신화를 낳았던 베단타 철학과 동일시되었다. 이제 인도는 몽상가와 신비가의 땅으로서 서구의 상상력을 사로잡게 되었고, 서구인의 인식에 깊이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두 명의 영국인 존 홀웰(John Holwell)과 알렉산더 도우(Alexander Dow)는 인도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에서 최초의 개척자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인도가 모든 지혜의 원천이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는 신념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초기 개척자는 불란서인 앙크틸 뒤페롱(Anquetil Duperron; 1723~1805)이었는데, 그는 우파니샤드(Upanishads)5)를 번역 출판하였고, 이는 유럽 사상가들이 인도사상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도연구의 가장 영향력 있는 단계는 1780년대 캘커타에 영국 관리들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윌리엄 존즈(William Jones; 1746~94)는 해로우와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은 저명한 법률가요, 언어학자에다 또한 시인이요, 급진적 시사평론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산스크리트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사실상 힌두교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학자라 할 수 있었다.

독일에 들어온 인도학의 주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과 인도 언어가 서로 놀라운 유사성을 지녔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유럽인의 기원의 문제는 얼마동안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오리엔탈 르네상스가 성숙에 도달한 것은 영국에서가 아니라 독일에서였다. 그 계보는 헤르더와 괴테로부터 헤겔과 셸링을 거쳐 슐레겔과 쇼펜하우어로 이어졌다. 칸트는 예외였다.

불교의 서진

독일에서는 낭만적 물결이 진정되고난 후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인도의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을 그치지 않았다. 에듀아르트 폰 하르트만(Eduard von Hartmann)의 유명한 저서「무의식의 철학 Philosophy of the Unconscious;1869」은 쇼펜하우어의 영향하에 쓰여졌는데, 그는 유대-기독교적 일신론에 따른 종교 철학에서 힌두교와 불교를 위한 자리를 할당했고, 기독교와 인도 종교 사이에 이루어질 미래의 종합을 예견했다

러시아에서도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열정이 서유럽에 못지 않았다.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정신적 위기의 시기에 부다의 가르침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는데, 불교의 보편적 자비와 비폭력 사상은 그의 사상과 저술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힌두교보다 불교가 점차 서구 오리엔탈리즘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게됐다. 불교가 19세기 유럽문화에 깊이 침투하게 된 것은 영국 동양학자 브라이언 호즈슨(Brian Hodgson)과 함께 시작됐다. 사실 19세기에 유럽인들의 마음에 남방불교 전통이 보다 우세하게 자리잡은 데 비해, 북방불교는 다음 세기가 되기까지 거의 무시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남방불교를 보다 오래되고 순수한 것으로 강조했던 결과였다.

그는 불교연구가 그리스적 기원을 가진 서구사상과 문화에 뿌리를 둔 배타적인 유럽적 편견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거기서 그는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탁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유대-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기독교가 구세주를 통해 구원을 찾는 곳에서 불교는 스스로의 의지의 부정에서 구원을 찾는다고 보았는데, 이 점이 그 자신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하는 점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동양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 가운데 바그너와 프리드리히 니체를 들 수 있다. 바그너는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대-기독교 교리와 비교해서 이 교리는 얼마나 숭엄하며, 얼마나 만족스러운가"라고 썼고, 기독교가 "알렉산더 원정 이후 지중해 연안에 확산되었던 저 숭엄한 불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추정을 반복했다.

불교와 니체의 관계는 보다 복합적이고 양면적이면서 더욱 중요하다. 그의 후기 사상, 특히 영원회귀사상은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이들은 니체의 권력의지와 초인에 대한 사색에서도 불교적 색채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니체의 저술과 불교교리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동양철학을 서구철학과 기독교적 가치관을 비판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회의의 시대와 불교

고등비평이나 실증주의나 다윈이즘이 이미 기독교 신앙의 철옹성을 허물어온 판에 불교가 어떤 면에서 새로운 종교적 대안의 가능성으로 여겨졌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사실상 새로이 유포된 불교교리는 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종교적 대안을 구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지녔다.

루이 자콜리오(Louis Jacolliot)는 그의 저서 「인도속의 성경 Bible dans l’Inde; 1868」에서 바이블 그 자체가 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고, 예수는 인도에서 수학했으며, 그리스도의 숭배는 힌두교의 크리쉬나(Krishna)9)신을 숭배하는 양식의 적용이라고 주장했다. 또 에르네스트 드 분센(Ernest de Bunsen) 같은 이는 예수는 불교 선교자들이 설립한 에쎄네파의 한 구성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유사한 주장을 했던 이들은 많은데, 현명한 오리엔탈리스트 막스 뮐러조차도 기독교가 불교의 영향하에서 발생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에 따르면, “불교와 현대과학 사이에는 밀접한 지적 연대”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러한 인식은 그 세기의 전환기에 지성인들 사이에 거의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자신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를 공부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회의의 시대’로 표현되는 빅토리아시대가 전통적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동양의 불교에 대한 호의로 대체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기말의 현상들

19세기말에 이르면 동양사상과 특히 불교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널리 확산되었다. 시인이었던 에드윈 아놀드는 그의 유명한 서사시 「아시아의 빛 The Light of Asia;1879」으로 불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유도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다의 이미지와 그의 가르침을 점증하는 낙관주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불교의 메시지를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아놀드가 그 시를 쓴 목적은 “동서양이 서로를 보다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하는 지속적인 욕구에 고취”되었기 때문이었다

블라바츠키 부인과 올코트 대령에 의해 세워진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의 출현과 급속한 성장 역시 19세기말 오리엔탈리즘의 급진적 발전에 대한 또 한가지 증거로 볼 수 있는데, 신지학(Theosophy)이라는 용어는 신플라톤주의와 그노시스교 전통을 거쳐 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포르피리(Porphyry)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새로운 운동을 모든 종교적 전통에 내재하는 고대의 보편적 진리와 동일시하였다. 그녀의 저작에는 점차적으로 동양사상이 주입되었고, 사실상 힌두의 베단타, 불교와 서구 비교철학에다 동시대의 진화론적 사상과도 뒤섞였다.

만남의 확대와 변용

세기말을 넘기고 20세기초에 접어들면, 이제 교육받은 유럽인들 가운데 계몽주의의 합리적 이상과 진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각성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 시기는 엄청난 문화적 소란의 시기로서 실증주의와 정신분석학과 같은 여러 가지 운동, 다윈이즘과 우생학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 상징주의, 표현주의와 관련된 예술 문학이론, 그리고 톨스토이즘과 바그너리즘으로부터 신-이교주의(neo-paganism) 및 신비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러 사상적 유행과 함께 이례적인 일련의 지적 투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시기였다. 물론 오리엔탈리즘도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처음 꽃을 피웠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이 시대에 오면 완전한 성숙에 도달한다. 1903년과 1906년 독일과 영국에서 각각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었다. 중국사상과 문화는 낭만주의 시대 이후 빛을 잃고 오랫동안 무시되고 경멸되었지만, 아더 웨일리(Arthur Waley;1889~1966)가 일련의 중국시를 번역함으로써 그 대중적 인기를 다소 회복하게 되었다.

티벳에 대한 중국의 침략과 동화정책, 달라이 라마와 그의 많은 추종 승려들의 망명과 그 결과로 티벳불교가 서구에서 더욱 주목을 받게되고, 그 호소력이 급속히 확산된 것도 20세기에 나타난 경이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근본불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타락된 유파로 경멸을 받았던 티벳불교가 최근에 와서는 서구 지식인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학적 차원

더욱이 최근 몇 10년 동안에는 요가와 동양무술에서부터 초월적 명상과 달라이 라마의 숭배에 이르기까지 동양철학과 종교에 관련된 여러 가지 실천이 다양화되고 또한 번성하게 되었다. 예이츠는 당시 시각예술과 음악과 병행해서 문학에서의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면서 빅토리아시대의 여러 가지 문화적 가설에 도전했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T. S. 엘리어트에 대한 동양의 영향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바드대학 재학시절 그는 어빙 배비트(Irving Babbit)의 영향으로 산스크리트어와 동양종교를 공부했고, 힌두경전, 특히 바가바드기타는 나중에 그의 「네 개의 4중주 Four Quartets」를 쓰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시에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주제와 무한한 순간의 신비적 경험을 시적 술어로 파악하려는 시도 등은 바가바드기타의 영향이었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역시 그러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데, 그도 모더니스트 시인들처럼 서구 현대문명의 정신적 불모와 절망으로 인해서 부닥치게된 신앙의 위기를 겪어왔고, 베단타의 신비주의에서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독일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에게서도 또한 현대문명에 대한 불안감과 환멸과 함께 정신적 목적의 상실감을 회복하기 위한 동양적 주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만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 The Glass Bead Game」에서 가장 웅변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인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후에 다시 그곳을 여행하기도 했으며, 평생을 통해서 그가 추구했던 것이 기독교와 동양의 신비적 신앙의 종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 중의 하나인 「싯달타 Siddhartha」는 고타마 부다의 젊은 시절에 토대를 둔 소설로서 부다의 인간성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감동적인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일종의 고백서이다.

헉슬리와 헤세의 작품은 1950년대 이래 서구 독자들의 상상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는 지성인들이나 교육받은 대중들 가운데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성장하던 시기였다. 비트족의 출현이 이즈음이다.

자발성과 즉각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불교는 이들에게 특별히 매력적인 것이었고, 게리 스나이더 (Gary Snyder), 잭 케루악(Jack Kerouac), 앨런 긴즈버그(Alan Ginsberg), 그리고 앨런 와츠(Alan Watts) 등은 헉슬리와 헤세와 마찬가지로 많은 젊은 세대들을 동양철학과 그 정신성으로 인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선을 과학과 심리학과 연결시켜 보려는 앨런 와츠의 시도는 학자들에 의해 아마츄어적인 것으로 거부되었지만, 그러나 그의 웅변적이고 자극적인 문체는 선을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보다 가까이 접근하도록 도왔다.

1960년대의 히피 현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트운동의 지속이요, 신성화였고, 또한 케루악의 비전의 실현이었다. 사회적 차원에서 그것은 표준화되고 경쟁적인 물질주의의 인습적인 문화에 대항하는 대항문화(counter-culture)를 대표했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과격한 비판이었으며, 종교적인 면에서는 마음 확장기술과 마약 사용을 통한 정신적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새로운 길의 추구였다.

살아 있는 사회적 현상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비트와 히피운동은 이제 역사의 일부가 되고, 흔적의 잔여물로서 남아 있을뿐이다.

포스트오리엔탈리즘을 향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오리엔탈리즘 자체는 어떤 변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가? 사실상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은 모더니즘의 전 시대를 넘어서서 새로운 방향을 지향하는, 그래서 새로운 건설적 가능성을 구하고자하는 긍정적인 전망의 증거를 여러 가지로 보이고 있다.

첫째 변화는 동양의 정신적인 사상과 실천을 채택하고 있는 서양인들의 수가 더욱 증가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된다. 철저한 종교적인 참여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클라크는 특히 도교에 대해서 주목한다.

두 번째로 최근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에서 보이고 있는 변화에는 그것이 생태학 또는 생태주의 운동과 관련해서 건설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적 가치관에 대해서 급진적 비판을 가하면서 서구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맥락에서 유용한 방식을 차용하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이 동양철학의 전통이다. 도교와 불교가 이에 대해서 가장 유용한 방식과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음은 여러 가지로 입증된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상호보완적으로 현대 사회와 세계의 모순과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문화를 함께 창조해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소회를 마무리한다. 읽기에 다소 집중력이 필요했다. 출퇴근길이 그러하듯 쉬운 독서는 아니었다. 저자의 인명표기가 대체적으로 구글로 검색되어 나오는 일반적 표기와 달라 위 글을 요약, 정리하면서 일부 변경하였다. 오리엔탈리즘의 부정적 서구 담론을 저자만의 지적 작업을 통해 계보를 들여다 보는 노력이 돋보였다. 생각보다 서구 지식인의 다양한 영역, 철학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생각날 때, 다시 들여다 보려고 나름 신중하게 요약했지만, 이후로도 계속해서 글을 다듬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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