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단단한 어른 이야기 - 드라마리뷰
<나의 아저씨>는 2019년도 백상예술 대상을 받은 작품이며 지금도 꾸준히 해외에서도 호평 받고 있는 드라마다. 지금도 있다금씩 다시 열어 보게 되는데, 역시나 따뜻한 이웃과 빛바랜 나의 축구모임 추억이 함께 떠올려진다. 20대 초반에는 교회 형들과 함께 일요일 내내 축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3형제도 함께 축구를 찼었다. 그렇게 밤 늦도록 축구를 차고는 함께 지글거리는 불판에 고기를 얹어 먹던 추억이 있다. 각자 직업도 다르지마는 땀흘리며 뛰놀고, 웃고 떠들던 기억들은 나 스스로를 박동훈(이선균 분)과 연결지어 동일시 시키는 묘한 구석이 있다. 그만큼 소속감이 두터웠고 끈끈했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누구에겐가 박동훈과 동일시 할 수 있을 만한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남다른 또 하나의 경험이라면, 극중 회사 사내 풍경이 나오는 이 건물일 것이다. 바로 내가 지금 근무하는 회사다. 가끔 촬영을 위해 건물을 내어준다는데, 회사 정문 장면 여러 샷, 지하 카페 장면, 3층 담배 피는 휴게소 장면 등 곳곳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한 마디로 박동훈이 걸어간 정문과 엘리베이터, 복도와 휴게소를 여러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나는 다니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더 하여 이 드라마를 더욱 각별하게 생각하게 끔한다.
이지안(아이유 분)이라는 극중 인물이 많은 사건에 연루되어 얽히고 섥히는 과정이 끊이지 않고 나오지만, 결국엔 평안으로 돌아가, 남들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멋진 이야기로 끝맺게 되어 마음이 너무 포근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아저씨> 보며 개인적으로 느낀 점을 들라면 4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사내 정치에 관한 이야기
박동훈이 다니는 회사 내, 임원 표싸움이 주요 이야기가 된다. 대표이사 재신임을 얻기 위해 필요한 세력을 규합하고, 반대세력을 음해하여 직위해제 시키려는데, 박동훈 부장이 연루된다.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그런데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대표이사의 선배였던 고로 박동훈이 껄끄러웠기는 매한가지였다. 더군다가 그의 아내가 대표이사와 간통이라니!
솔직히 좀 극적이긴 했지만, 대개의 사내정치란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연임하고, 좀더 자리를 지키고, 좀더 좋은 자리에 있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문제는 그런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음해와 조작이 판을 치는 것이다. 이렇게 별들의 전쟁이 휘몰아 치고나면 피해는 고스란히 아랫 사람들에게 미치는 경향을 더러 봐 왔다. 인간의 욕심과 자존심의 싸움에서 희생되는 다수의 무리들 말이다. 극 중 박동훈과 이지안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도청에 관한 이야기
이 드라마에서 도청이 차지하는 극적요소는 절대적이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와 같이 박동훈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약점을 털어내려 하지만, 도리어 그에게 연민이 느껴지고, 바보같이 후배에게 당하는 것만 같아, 이지안은 돕기로 결심한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감시자가 동정하게 되고 마음이 동요되는 것같 같은 이치로 말이다.
사적인 감청, 불법사찰이 엄연히 제한되어 있다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완전한 어른으로서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느냐는 면에서 박동훈의 삶은 평범한 측면에서 보자면 흠결이 없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판타지 같다. 뒤돌아 서서 뒷담화 정도는 할 만 한데, 혼잣말로라도 하지 않는다. 깊은 한숨과 내면으로 삵히는 고민이 느껴진다. 거의 성인군자 처럼 모든 걸 감내한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40대 가장들의 고독이 동일시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구 쏟아내는 것보다 그의 과묵함이 좋아 보인다. 어른스러워 보인다.
가정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
박동훈은 유독 아내 눈치를 보느라 시댁과 거리를 두고 살곤 한다. 아내가 사법고시 공부할 때조차도 내조했었지만, 이제 사회적 지위가 변호사가 된 마당이고 보니 분가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아들은 미국에 유학 가 있다. 아내와 어떤 면에서 대화를 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내도 더러 답답하다. 인격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좋지만 너무 관심을 안 가져줬고, 그 사이를 남편의 대표이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 이후로 둘은 호텔에서 만남을 가져왔다.
한동안 몰랐는데, 이젠 알아 버렸다.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 최대한 조용히, 소란스럽지 않게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려 했다. 그렇치만 저쪽이 비겁하게 나온다. 사람은 고쳐쓰지 못하는 거란 옛말이 맞았던 것일까? 첫인상부터 그래 보였던 녀석이었다. 욕심많은 친구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대표이사는 스스로 무너져갔다. 협박을 받는 듯했다. 그렇게 피폐하게 야위어 갔다.
형제들은 어찌하다 알게됐다. 그러나 동생의 아픔에 나서서 어쩌진 못했다. 그저 말없이 지지해줬다. 아내는 참회의 마음으로 이지안의 변호를 해줬다. 그리고 아이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동훈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정은 되살렸다. 아내도 이젠 남편이 얼마나 괜찮고 단단한 사람인지 안다.
좋은 이웃과 함께 한다는 것
이 드라마를 보면서 드는 마지막 부분은 인간은 고독하지만, 그렇다고 혼자는 아니라는 희망이다. 학교 동문이자 조기축구회 모임을 통해 강한 확장된 형제애와 가족애가 느껴진다. 결속력도 강하고 누군가를 돕는다는 행위도 극적이다. 이지안의 할머니 장례식 장면이 대미를 장식한다. 끈끈한 우정과 다정한 마음 씀씀이가 전해져 온다.
그런 부족애를 과연 지금까지 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초등학교 때부터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 끈끈한 결속력을 갖는다. 이 자체가 일종의 판타지가 아닐까 싶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고 초능력을 사용해서만 판타지는 아니다. 이런 남부러운 환경과 정황이 요즘 보기드문 광경이기에 더더욱 판타지 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혹자는 40대 남성의 판타지물이라 한다.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니나, 그럼에도 단단한 사람을 그려내고 닮고 싶게 만드는 이 드라마의 내용은 울림이 크다. 글로벌한 정서에서도 먹힌다는 것은 한국적 정서를 넘어선 우리 내면에 가닿은 목가적 정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늠 의미일지 모르겠다.